
우민은 9월 30일자 경향신문 실린 ‘정희진의 낯선 사이-소통이 안 되는 이유’를 읽고 진실로 감탄했다. 올해 읽은 신문칼럼 중 최고라는 생각까지 했다. 그만큼 문제의식도 날카로웠지만 짧은 문장들 사이에서 깊고 충만한 사유의 힘과 대안 제시까지 읽어낼 수 있는 비범한 글이었다.
칼럼은 무엇보다 ‘소통의 중요성’을 당위적으로 읊조리지 않는다. 처음부터 진정한 소통은 불가능에 가깝지만 최소한의 소통이라도 가능하다면 다행이라는 생각으로 이에 접근하자고 제안한다.
“소통은 ‘본래’ 불가능한 인간사다. 나는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보다 왜 불가능한가를 살펴봄으로써 최소한의 소통을 모색하는 것이 합리적이고 지혜로운 삶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굳이 불가능에 가까운 소통을 위해 노력해야 할 이유는 뭘까? 인간의 행복은 개체적 삶의 만족에 머물지 않고 공동체적 삶의 구현을 통해 이뤄지기 때문이다. ‘혼자만 잘살믄 무슨 재민겨’라는 전우익 선생의 책 제목이 말하는 바다. 인간은 사적인 삶인 조에(zôé)를 넘어 공적인 삶인 비오스(bíos)를 추구하는 '호모 폴리티쿠스'라고 갈파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통찰과도 궤를 같이 한다.
“타인과 연결은 삶의 조건이자 의미가 된다. 그렇지 않을 때 우리는 “외롭다”고 말한다. 외로움과 혼자임은 다르다. 가장 외로운 시간은 혼자 있을 때가 아니라 소통이 안 되는 타인과 제도적 관계로 묶여 있을 때다. 가족, 직장 생활, 파트너, 사제 관계, 군대 내 계급 등이 대표적인 (폭력적) 제도다.”
칼럼은 심지어 가장 완벽한 의사소통은 명령과 복종으로 이루어진 ‘폭력’일지도 모른다고 지적한다. 어떻게든 소통하기 위해 대화를 시도하는 사람은 대체로 약자인 반면 강자는 대화가 아니라 힘의 원리로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
약자가 소통하고 대화하자면 강자는 “그래서 요점이 뭔데?”나 “예, 아니요로만 말하시오”라는 식으로 대응하는 이유다. 한국사회에서 가장 힘 있는 자리에 앉은 사람이 야당 및 국민과 소통이 어려답고 생각했을 때 대화를 포기하고 무력을 동원한 비상계엄을 선택한 이유도 거기에 있는 것 아닐까?

소통을 잘 하려면 귀를 잘 기울이는 사람, 굿 리스너(good listener)가 돼야 한다고들 한다. 현실은 반대로 흘러가고 있지 않은가. 현대의 권력자들은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것’ 자체를 아예 전담조직까지 만들어 떠넘긴다. 공조직이 별도의 민원센터를 만드는 것, 민간 기업체는 아예 외부에 콜센터를 세우는 것이 그 증좌다.
민원센터와 콜센터의 담당자들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준다지마 아무런 실권이 없기에 ‘욕받이’에 가깝다. 동서양을 가릴 것 없이 권력자들은 상을 당했을 때 자기 대신 곡하는 여종인 곡비(哭婢)를 내세웠다. 과거의 권력자들이 슬픔을 외주화 했다면 현대의 권력자들은 소통의 의무를 외주화 하고 있는 거 아닐까? 그나마 그런 ‘영혼 없는 듣기’조차 귀찮다고 아예 AI에게 떠넘기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현대인의 소통불가는 이러한 권력관계의 산물로만 봐야할까? 정희진 칼럼의 비범함은 그렇게 책임을 타자화 하는 전형적 좌파 논리에 함몰되지 않은 점에서도 확인된다. 소통이 안 되는 책임을 상대에게만 떠넘기려 하지 말고 자신에게서 먼저 찾는 성찰에서 먼저 시작하자고 제안한다.
“대화는 본디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길이다. 사람들과 만난 후 우울하거나 찝찝한 적이 있다면 두 가지 중 하나가 아닐까. 상대방의 무례로 내 기분이 상했거나 내가 말을 너무 많이 해서 내게로 돌아오는 길(성찰)이 번잡하고 부끄러운 경우가 그것이다. 소통에 임하는 최선의 방법은 결국 나 자신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
이는 우민이 오래 전에 경탄하며 읽은 어느 칼럼의 구절과 공명한다. “‘나’의 명분 뒤에 숨은 실리를 돌아보고, ‘남’의 실리 뒤에 숨은 명분을 돌아보는 것이 성찰이다”라는 문구다.
소통이 힘겨운 것은 무례하고 고압적인 ‘남’ 때문만이 아니라 매번 남 탓하며 자기 하소연하기 바쁜 ‘나’ 때문이기도 하다는 자각이 필요하다. 소통을 위한 대화나 토론에 나서기 위해서는 먼저 ‘소통 전의 나’와 다른 ‘소통 후의 나’를 전제로 해야 한다. 그런 마음가짐 없이 “대화가 필요해”만 되뇌는 것은 공염불에 불과하다.
https://www.khan.co.kr/article/202509302146005
[정희진의 낯선 사이]소통이 안 되는 이유
독일의 신학자 게르하르트 로핑크의 책 <죽음이 마지막 말은 아니다>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모든 사람에게는 비밀스러운 세계가 있다. 가장 아름다운 순간으로 빛나고, 가장 끔찍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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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0월 3일(흐리고 비)
#우민은 '어리석은 백성(愚民)'이자 '근심하는 백성(憂民)'인 동시에 '또 하나의 백성(又民)'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제 자신에게 붙인 별호입니다. 우민일기는 전지적 작가 시점에 가까운 '맨스플레인'에서 벗어나보자는 생각에 제 자신을 3인칭으로 객관화하려는 글쓰기 시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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