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의 바리톤 색소폰 연주자 제리 멀리건(1927~1996)이 1963년 발표한 앨범 'Night Lights'에 수록된 'Prelude in E minor'라는 연주곡입니다. 처음 들어보시는 분들도 어디서 많이 들어본 선율인데 하실 겁니다. 쇼팽의 전주곡(Prelude, 작품번호 24번) 중 4번째 곡을 재즈 풍으로 편곡했기 때문입니다.
쇼팽의 전주곡은 장조 12곡과 단조 12곡, 합쳐서 24곡의 짧은 소곡으로 구성돼 있죠. 그중에서 14번 '빗방울 전주곡(Prelude in D flat major)'이 가장 유명하죠. 그 다음으로 유명한 곡이 4번 E단조 전주곡 아닐까 합니다.
4번 E단조 전주곡은 쇼팽의 피아노곡 중 가장 비장미 넘치는 곡 아닐까 합니다. 쇼팽이 자신의 장례식 때 모짜르트의 레퀴엠과 함께 이 곡을 연주해달라고 부탁한 이유도 거기에 있지 않을까요?
제리 멀리건은 쇼팽의 그 비장한 곡을 우수에 차긴 했지만 흥겨운 리듬감까지 느껴지는 도회적 분위기 물씬한 연주곡으로 바꿔 들려줍니다. 쇼팽의 원곡이 폐부에 와서 박히는 슬픔을 담아낸다면 멀리건의 곡은 아련하게 맴도는 상실감을 그려냅니다.
도시의 야경을 포착한 Night Lights 앨범 재킷 그림과 어울리는 적당히 블루지한 곡이죠. 그래서 같은 곡이란 실감이 잘 나지 않습니다. 재즈가 얼나마 도회적 장르의 음악인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 아닐까 합니다.
바리톤 색소폰 연주자는 테너 색소폰 연주자나 알토 색소폰 연주자에 비해 드문데 제리 멀리건이야말로 바리톤 색소폰의 선두주자라 부를만 합니다. 세련되고 도회적인 쿨 재즈의 전성기를 대표하는 연주자로 1950년부터 간암으로 숨지기 전인 1990년대 중반까지 40여년 간 60여장의 앨범을 발표할 정도로 긴 생명력을 자랑했습니다. 그런 멀리건 답게 쇼팽의 치명적 슬픔까지도 어깨춤을 추며 견딜만한 도회적 우수로 쿨하게 중화해냈습니다.
P. S. 제리 멀리건을 게리 멀리건으로 표기하는 경우를 보는데 그의 본명이 제럴드(Gerald)라는 점에서 제리로 발음하는 게 맞습니다.
https://youtu.be/4ntWWtCmZ2E?si=qCN3A4oG6IaQcTwW
-2025년 8월 25일(비왔다 맑았다를 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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