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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안부곡

미스 팔레스타인과 딜라일라

미스 유니버스에 출전하게 된 미스 팔레스타인 나딘 아유브 ©nadeen.m.ayoub

 

 

팔레스타인을 대표하는 미인이 국가별 미인대회인 미스 유니버스에 사상 처음으로 출전하게 됐다는 뉴스를 접했습니다. 정치인으로서 탄핵 위기에 몰리자 이를 타개하기 위해 이스라엘민족과 팔레스타인 민족의 갈등을 악용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에 대한 반발로 국제사회에서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인정하려는 분위기가 확산된 결과 아닐까 합니다. 올해 스물일곱의 미스 팔레스타인 나딘 아유브의 선전을 기원하면서 팔레스타인인의 민족적 기원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볼까 합니다.

 

팔레스타인이란 명칭은 히브리어로 플레셋, 영어로 필리스틴스(philistines)에서 나왔습니다. 어원이 어떻게 될까요? 히브리성경(구약)에 유대민족의 숙적으로 그려진 블레셋인들의 땅이라는 뜻입니다. 

 

블레셋인 중에서 가장 유명한 남녀를 각각 한 명씩 뽑을 수 있습니다. 남자로는 다윗 왕이 소년시절 돌팔매로 물리친 거인 골리앗이 있습니다. 여자로는 천하장사 삼손을 유혹해 그 힘의 비결이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에 있음을 캐낸 요부 데릴라가 있죠. 성경에 등장하는 팜 파탈 중에서 가장 유명한 두 명은 세례자 요한을 처형시킨 헤롯왕의 딸 살로메 그리고 데릴라가 아닐까합니다.

 

데릴라는 영국가수 톰 존슨이 1967년 발표한 팝송과 이를 우리말로 번안해 부른 조영남의 노래 '딜라일라(Delilah)'에도 아로새겨져 있죠. 사랑하는 여인이 몰래 바람울 피운다는 사실에 분노해 그녀를 살해할 결심을 한 오쟁이진 남자의 피맺힌 노래죠. 여인의 이름을 구약에 등장하는 팜파탈의 대명사 이름을 갖다 쓴 겁니. 뒤집어 말하면 팔레스타인 여성의 혈통에는 데릴라로 대표되는 치명적 아름다움이 흐를 수 있다는 얘기. 

 

루벤스의 그림으로 알려졌지만 현재는 정확한 출처가 불분명한 '삼손과 데릴라'(1609~10) . 영국 내셔널갤러리 소장.

 

 

구약에 따르면 블레셋인들은 가나안(현재의 이스라엘) 서쪽 땅에서 이주해와 원주민이던 아위 족을 물리치고 현재 이스라엘 남부의 해안가 도시 중심의 느슨한 도시연맹체를 유지하며 오랜 세월 유대민족과 각축전을 벌입니다. 호전적이고 쾌락주의적인 부족으로 형상화된 그들은 다윗 왕 시절 가나안에서 밀려났고 바빌론의 느브갓네살 왕의 정복으로 멸망했다고 전해집니다. 현재 팔레스타인들은 이 블레셋인들의 혈통을 물려받은 아랍인들로 추정됩니다. 

 

그럼 실제 이 블레셋인들은 어디서 온 사람들일까요? 1997년~2013년 이스라엘 남부 항구도시 아쉬켈론(구약 표기로 아스글론) 인근에서 블레셋인의 공동묘지와 주거지가 대거 발굴됐습니다. 여기서 발굴된 4명의 유아를 포함한 10명의 유해에서 DNA 분석 결과가 2019년 '사이언스 어드밴시스(Science Advances)'에 발표됐습니다. 그에 따르면 블레셋인들은 기원전 12세기~8세기 청동기 시대 말기와 철기 시대 초기 지중해 연안 유럽 남부에서 이주해온 유럽혈통의 민족이었다네요.

흥미롭게도 이들의 DNA에는 이미 남유럽인과 현지인의 유전자가 혼재해 있었습니다. 몇 세대 안에 블레셋인들이 현지 원주민들에 동화됐음을 보여줍니다. 그로부터 몇 백년 뒤 블레셋 묘지에 묻힌 사람들에게서는 사실 유럽 계통의 유전자가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유전적으로 당시 블레셋 사람들은 가나안인처럼 보였다. 연구를 이끈 미국 위튼대의 대니얼 매스터 교수는 "그들이 왔을 때는 주변 다른 그룹과 결혼하는 것에 대한 금기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습니다.

 

다윗과 블리셋인인 골리앗의 대결을 형상화한 그림 [출처 불명]

 

 

블레셋인의 이주가 이뤄진 초창기 어린이 유해에서는 그리스, 스페인, 사르데냐의 인구에서 볼 수 있는 것과 일치하는 유전적 특징이 나타났습니다. 연구진은 청동기 시대 말이나 초기 철기 시대에 실제로 이주가 일어났음을 입증하는 증거라고 밝혔습니다. 만약 사실이라면 이 유아들은 가나안에 도착한 첫 번째 블레셋 사람들의 손자 또는 증손자였을 수 있다는 것.

고고학적 발굴 결과도 기원전 1200년 경 새로운 건축물과 유물이 대거 등장해 블레셋인들이 이 즈음 도래했음을 뒷받침합니다. 예를 들어 블레셋인들의 유적지에서 발굴된 도자기는 현지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지만 에게해 문명을 세운 미케네의 도자기를 닮았다고 합니다. 구약에도 블레셋의 기원지로 지중해 섬나라 크레타에 해당하는 '카프토르'가 언급돼 있습니다. 이 무렵 에게해와 동지중해의 문명이 붕괴되면서 남부유럽에 살던 사람이 지중해 건너 가나안 땅으로 이주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 블레셋 족은 이집트 상형문자의 기록에서도 발견되는데 기원전 1180년경 파라오 람세스 3세와 전쟁을 벌인 해양민족으로 언급돼 있습니다.

이를 종합해 보면 유대인의 눈에 왜 블레셋인 남성들이 골리앗처럼 크고 호전적으로 비쳤는지, 또 여성들은 왜 데릴라처럼 육감적이고 풍만하게 다가섰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구약에서 유대인들을 괴롭힌 그들은 훗날 그 종교를 받아들여 기독교 문명을 일구게 되는 유럽인들의 후손이었던 겁니다. 

 

https://youtu.be/Qvo5SeAwz88?si=Zfvw5xbSdnzNI7Ga

 

-2025년 8월 21일(구름 많이 끼고 후덥지근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