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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안부곡

드라마 '번화'에 영화 '2046' 메인 테마가 흐르는 이유

© Blossoms Island Pcitures LTD

 

 

왕가위 드라마 '번화'를 곶감 빼먹듯이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반부터 느닷없이 이 음악이 흘러나와 훔칫 놀랐습니다. 왕가위의 2006년 영화 '2046'의 메인 테마곡이거든요. 

 

'이렇게 대놓고 자기표절을 한다고?'

 

사실 드라마 초반부를 보면서 '정말 왕가위가 찍은 게 맞어?'라는 의심을 하긴 했습니다. 중국 정부의 검열을 의시하면서 얼마나 자유로운 영상을 찍을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강했기 때문. 그래서 늑장 촬영으로 유명한 왕가위가 이름만 빌려주고 사실상 태업을 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왕가위의 지문이 선명히 드러나더군요.  외로운 도시남녀의 실루엣과 클로즈업 중심의 카메라 워킹과 세련된 음악, 독백체의 나레이션 그리고 중간중간 자막의 등장. 무대가 홍콩에서 상하이로 바뀌었고, 배우들도 싹 다 바뀌었지만 분위기와 캐릭터는 왕가위 스타일 그대로였습니다. 후거, 신즈레이, 탕연, 마이리 등 상대적으로 젊은 주연급 배우의 농익은 연기력을 끌어낸 연출력도 놀라웠습니다. '중국 배우들이 이렇게 연기를 잘했다고?

 

그런데 왜 '2046'의 테마곡을 여보란듯이 '번화'에 갖다 쓴 것일까요? 작품을 다 본 것이 아니라 가물가물하지만 2가지에 주목했습니다. '번화'가 발표된 해가 2023년. 2046까지 딱 절반을 남긴 시점입니다. 2046년은 홍콩이 명목상으로라도 중국으로부터 독립성을 유지하느냐 아니면 중국으로 흡수되느냐는 기점이 되는 해입니다. 그런 해에 홍콩에서 상하이로 무대를 옮겨온 왕가위가 궁극적으로 말하고픈 것 역시 중국 내 경제적 자유의 상징도시인 상하이의 운명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임을 암시하기 위함 아닐까요?

 

다른 하나는 이 음악의 자곡가가 '화양연화'에 삽입곡으로 많은 사랑을 받은 '유메지의 테마'를 작곡한  일본 영화음악 감독 우메바야시 시게루라는 점입니다. '유메지의 테마'는 사실 '화양연화'를 위해 작곡된 곡이 아닙니다. 20세기 초 일본의 화가이자 시인인 다케하시 유메지의 삶과 꿈을 극화한 스즈키 세이준 감독의 일본 영화 '유메지'(1991)의 테마곡이었습니다. 다른 영화의 테마곡을 갖고 와 '화양연화'(2000)에 쓴 것이죠. 마찬가지로 2006년 제작된 '2046'의 테마곡으로 우메바야시가 작곡한 곡을 2023년 제작된 '번화'의 삽입곡으로 끌어다 쓴 것.

 

'우메지'는 1920,30년대 제국주의 일본이 전쟁국가로서 자기파멸의 길을 걷기 직전 분열된 일본의 초상을 그린 영화입니다. '화양연화'는 1997년 1997년 홍콩 반환이 이뤄진 직후 자유로웠고 그래서 아름다웠던 홍콩의 과거를 음미하는 영화입니다. '유메지의 테마'는 그 둘의 징검다리가 됨으로써 광기와 아름다움이 종이 한 장 차이임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 음악입니다.

 

그렇다면 '2046'과 '번화'의 징검다리가 되는 우메바야시의 음악은 무엇을 말하기 위함일까요? 사회주의 중국으로부터 자유로웠지만 다시 사회주의에 포박된 홍콩의 미래와 개혁개방을 통해 중국경제의 수도가 됐지만 역시 미래가 불확실한 상하이가 운명적 쌍둥이임을 말하고자 함이 아닐까요?

 

 

https://www.youtube.com/watch?v=6dOMMieLKlU&list=RD6dOMMieLKlU&start_radio=1

 

 

 

-2025년 8월 16일(맑고 무더위 다시 찾아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