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우민일기

'살아남은 자의 슬픔' vs '남은 이에게'

[(주)지니뮤직]

 
 
누군가 4.19를 실패한 혁명이라 했다. 정권교체엔 성공했지만 5,16 쿠데타로 그 순수한 정신이 훼손됐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주로 당대를 사셨던 4.19세대들의 뼈아픈 시각이다.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고 우민은 생각한다. 
 
그렇지만 '한국적인 것(Koreaness)'의 발현이라는 좀 더 긴 호흡에서 바라보면 결코 실패한 혁명으로 볼 수 없다. 무엇이 한국적인 것일까? 부당한 권력에 대한 집단적 저항의식의 발현이라는 것이 공화주의자로서 우민의 생각이다. 19세기 진주민란과 동학농인혁명에서 엿보이기 시작한 그 집단적 저항의식은 3.1운동을 통해 한국인 전체의 DNA로 아로새겨졌다는 것이 우민의 역사이론이다.
 
영국 역사가 에릭 홉스봄은 1차대전이 발발한 1914년부터 소련이 붕괴한 1991년까지를 '단기 20세기'로 규정했다. 우민은 이에 빗대 3.1운동이 발생한 1919년부터 현재까지를 '한국적 20세기'라고 부른다. 한국적 20세기는 왕조시대에서 진정한 공화국시대로 전환의 시기라는 의미에서다.

1919년은 진정한 의미에서 조선의 마지막 왕인 고종의 죽음과 공화주의적 정치의식의 탄생이라 할 3.1운동 그리고 공화정을 채택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출범이 이뤄진 해다. 왕정체제를 상징하는 왕의 죽음과 공화정의 탄생이 그 한 해에 이뤄진 것이다. 그리고 그 한국적인 것은 4.19(1960)와 10.26(1979), 5.18(1980), 6.10(1987), 3.10(2017 박근혜 탄핵), 12.3(2024)으로 '한국적 20세기'의 주요 고비마다 작렬해왔다.
 
이러한 장기적 역사관에 비춰봤을 때 3.1운동이 그 출발점이라면 4.19는 그 반환점이다. 3.1운동은 장기적 관점에서 승리지만 당대로 국한했을 때는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4.19는 단기적 관점에세도 정권교체에 성공한 첫 혁명이기 때문이다. 그 4.19의 짜릿한 성공은 그 이후 이어지는 무수한 비폭력 시민혁명의 원동력이 됐음을 잊어선 안된다.
 
그 한국적 20세기는 진정한 공화주의를 실현하려는 공화파 대 탁월한 지도자 한 명 아래 똘똘 뭉쳐야한다는 영웅파의 대결로 요약된다는 것이 공화주의자인 우민의 생각이다. 영웅파를 대표하는 인물이 북의 김일성-김정일-김정은과 남의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이명박-박근혜-윤석열이라는 이항대립의 역사관이다.
 
그런 영웅파들이 벌인 반공화주의적 반동이 5.16(1961), 유신개헌(1972), 12.12(1979), 광주유혈진압(1980), 3당합당 및 공안정국(1990~91), 순실의 농단(2013~2017), 윤석열의 난(2024)이다. 윤석열의 난과 이를 진압하기 위한 '빛의 혁명'이 동시적으로 발생한 2024년은 어쩌면 한국적 20세기의 완료로 기억될 수 있다고 우민은 생각한다.
 
공화파 대 영웅파의 대결로 압축되는 '한국적 20세기'의 핵심을 이루는 것이 우민의 규정하는  Koreaness다. 바로 '부당한 권력에 대한 집단적 저항의식'이다. 한국정치의 역동성이란 말도 바로 이런 집단적 저항의식에서 비롯한다. 이를 서구적 계급투쟁 관점에 맞춰 좌우대결로 포착하려 시도했기에 한국 역사학이 실패로 귀결했다는 것이 우민의 판단이다.
 
한국적인 것은 동아시아의 다른 나라와 한국을 차별화시켜주는 요소이기도 하다. 중국은 공산혁명을 통해 권력교체를 이뤘지만 그것은 소수의 혁명가에 의해 기획된 반란에 가깝다는 점에서 과거의 왕조 교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게다가 권력이 여전히 소수의 공산당원에 집중돼 있다는 점에서 미완의 혁명에 불과하다. 일본의 민주화는 패전의 대가로 미국에서 이식됐다는 점에서 역시 뿌리가 약하다. 반면 한국의 민주화는 주권자인 국민 대다수가 거리로 나서 쟁취한 것으로서 위기상황에서 어김없이 작동한다는 점에서 질적으로 차별화된다.
 
이러한 Koreaness의 관점에서 본 한국인들은 이렇게 설명될 수 있다. 부당한 권력남용을 참고 참다가 한계점을 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국민적 저항에 나설 줄 안다. 서구와 동아시아의 그 어떤 나라보다 평등의식이 강하기에 재벌 골리고 놀리기에 능하다. 속물근성에 물들었을지언정 아무리 나쁜 놈에게라도 "밥은 먹고 다니냐'고 챙길 정도로 여전히 정도 많다.
 
4.19는 결코 외롭지 않다. 3.1이란 자랑스러운 아버지가 있고, 10.26, 5.18, 6.10, 3.10, 12.3이란 벅찬 자식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서 스러져간 무수한 영혼들이 결코 외롭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유대인학살과 좌우 정치투쟁의 아픔을 짊어진 서구 지식인들이 브레히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읊조릴 때 영웅파에 맞서 공화파의 대결을 펼쳐온 한국인들은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겠다'는 윤동주의 '서시'를 읊조리는 이유도 거기에 있지 않을까? 오늘밤 신지훈의 데뷔 앨범 '별과 추억과 시'에 수록된  '남은 이에게'를 우민이 듣고 또 듣는 이유 또한 같지 않을까?
 
보고싶다 슬퍼 말아요
날 위해 울지 말아요
난 때론 스쳐가는 향기 되어
그대 어깨 위를 토닥일 테니
그때만 날 돌아봐 주오
아픈 밤들은 잠시면 됐으니
찬란했던 우리 추억을 두고
이제는 살아가세요
 
저 은하수 너머에서
우리 다시 만나게 되는 날
몹쓸 기다림이 참 슬펐다고
손 놓지 말자 약속해요
 
저 은하수 너머에서
우리 다시 만나게 되는 날
몹쓸 기다림이 참 슬펐다고
손 놓지 말자 약속해요
 
보고싶다 슬퍼 말아요
날 위해 울지 말아요
찬란했던 우리 추억을 두고
이제는 살아가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OiFTbTkf4jk&list=RDOiFTbTkf4jk&start_radio=1

 

 
 
-2026년 4월 19일(보스턴에선 흐리고 비 내리기를 반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