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들은 선악, 진위, 미추의 이분법으로 세상을 보고 해석한다. 세상과 사태를 분류하고 이해하는데 이분법의 렌즈가 편하고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먹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내편과 네편을 명확히 구별하는 것이 자연상태에서 생존에 큰 도움을 주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경제적이란 표현이 가능하다. 또 그렇기에 합리적이란 주장의 근거가 된다.
문제는 인간은 자연 속에 존재하는 것을 넘어 인위를 만들어내는 존재라는 데 있다. 자연도 알고보면 결코 단순하지 않다. 하지만 인위는 자연보다 직관적으로 더 복잡하고 다원적인 질서를 빚어낸다. 그렇기에 이분법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사태가 많이 발생하게 된다. 그에 대처하기 위해 윤리, 논리, 비평이라는 새로운 사유도구가 인간에게 주어지게 된 것이다.
이분법의 사고는 자연의 산물이다. 선악 진위 미추 역시 그렇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거기서 출발했지만 인위의 세계에서 작동하는 윤리, 논리, 비평은 그런 이분법에 머물지 않는다. 흑백의 중간에 해당하는 회색지대를 탐색하고 점검하고 개척한다. 이분법의 칼날로 결코 잘라낼 수 없는 '고르고스의 매듭' 풀기에 도전하고, 딜렘마라는 이름의 미로에서 길찾기를 멈추지 않는다. 윤리, 논리, 비평은 그렇게 인위의 산물이다.
많은 사람들은 자연/천연을 찬미하고 인위/인공을 폄하한다. 인위/인공이 많아질수록 자연/천연이 희귀하다는 착각 때문이다. 인위/인공이 많다 한들 자연/천연보다 많을 순 없다. 다만 상품으로서 가치가 있는 자연/천연보다 인위/인공이 더 많을 뿐이다. 이런 도착으로 인해 자연/천연의 가치가 더 돋보이게 만들 뿐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역시 경제적/합리적 사고방식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우민은 여기서 경제적/합리적 사고가 인간의 본능적 사고방식인 이분법적 사유의 후손임을 발견하게 된다. 그와 달리 윤리/논리/비평은 인위/인공이 탄생시킨 사유방식이라는 것도 깨닫게 된다. 경제적 가치가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인위적이고 인공적인 것으로 인해 비경제적 사유방식이 생성됐다는 이 깨달음은 인위의 가치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인위적인 것의 부정적 측면만 보지 말고 긍정적 측면도 존중해야 한다는 발상의 전환이다.

이분법과 경제적 사고가 자연과 본능의 산물이라면 윤리/논리/비평은 인위의 선물이라는 이런 논리 전개에는 약점이 존재한다. 그럴 듯해보이지만 결국 이분법적 사고로 귀결 아니냐는 비판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선 항상 제3의 범주가 필요하다. 그게 뭘까? 자연도 아니면서 인위도 아닌 것. 바로 하이브리드/혼종이다.
하이브리드/혼종은 언데드와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18세기 철학자 칸트는 '산 자'라는 긍정판단과 '죽은 자' 부정판단의 혼종으로서 무한판단에 해당하는 '죽지 않은 자'라는 언데드의 철학적 개념을 제시했다. 1804년 칸트가 죽고 12년 뒤 스위스 제네바 레만호수가의 한 별장에서 그 언데드의 문학이 탄생한다.
1816년 6월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바이런이 머물던 별장(빌라 디오다티)을 찾은 또다른 셸리 부부가 폭풍우치는 밤에 모여서 돌아가며 무서운 이야기를 들려주고는 이를 토대로 소설을 발표하기로 약속한다. 그 약속의 산물로 셸리의 아내인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1818)과 바이런의 주치의였던 존 폴리도리의 '뱀파이어'(1819)가 발표된다.
특히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은 자연과 인위의 합작품이라는 점에서 하이브리드/혼종의 대명사가 된다. 이분법/경제적 사유에 따르면 그 괴물은 악하고, 추하고, 가짜이기에 태어나서도 안되고 파괴돼야 마땅한 존재다. 그러나 윤리/논리/비평의 사유는 그렇게 단언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 원하지도 않았지만 존재하게 됐고, 자신의 존재이유를 탐구하며 사랑의 의미를 묻기에 선하고, 아름답고, 진실된. 한마디로 인간적 존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프랑켄슈타인은 아직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하이브리드다. 하지만 프랑스 사상가 브뤼노 라투르는 주체와 객체를 집요하게 구분하려는 근대적 사유에 저항하는 주체와 객체가 뒤섞인 하이브리드가 얼마나 넘쳐나는지를 갈파하며 주체와 객체, 영혼과 물질의 이분법을 격파한다. 실험실에서의 실험이나 사이보그, 오존층 파괴와 그로 인한 기후위기, 인간에 의해 변질된 에이즈바이러스 등이 대표적이다.
우민은 그 하이브르의 예를 원소에서도 발견한다. 지금까지 대략 118종의 원소가 발견됐다. 그 중에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원소는 94종이고 나머지 24종은 실험실에서 합성된 원소, 곧 하이브리드다. 윤리/논리/비평은 그렇게 자연과 인위, 하이브리드를 횡단할 때 비로소 빛을 발할 수 있다.
자연-인위-하이브리드로 이어지는 존재론에서 끌어내야할 진정한 가치는 인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혁파하는 것이야 한다고 우민은 생각한다. 인위를 부정적으로 인식한 도가적 사유와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루소 식의 원시적 삶을 찬양하고 문명사회를 비판하는 사유에도 이분법적 사유 그리고 의외로 경제적 사유가 숨어 있음을 꿰뚫어볼 필요가 있다. 인위 그리고 그 산물로서 문명이 간직한 선함과 진실됨, 아름다움을 자연의 그것만큼이나 존중할 수 있어야 문명인이라는 명칭에 진정 값할 수 있지 않을까?
-2026년 3월 7일(꽃샘추위로 영하의 추위가 엄습)
#우민은 '어리석은 백성(愚民)'이자 '근심하는 백성(憂民)'인 동시에 '또 하나의 백성(又民)'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제 자신에게 붙인 별호입니다. 우민일기는 전지적 작가 시점에 가까운 '맨스플레인'에서 벗어나보자는 생각에 제 자신을 3인칭으로 객관화하려는 글쓰기 시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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