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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안부곡

흑백요리사라는 매트릭스의 소스 코드를 읽어낸 사람

[넷플릭스]

 

 

누군가 그러더군요. 흑백요리사 시즌1의 씬 스틸러 에드워드 리가 '비빔밥 인간'이라면 시즌2의 최종 우승자 최강록은 '조림인간'이라고. 2개 시즌의 핵심을 꿰뚫어 본 통찰력있는 표현 아닐까 합니다.

 

'흑백요리사'는 아이디어보다 편집이 뛰어난 예능 프로그램입니다. 매주 3회 분이 공개되는데 맨 마지막 편에서 꼭 다음회가 어떻게 될 지 궁금증을 증폭시키는 '악마의 편집'이 이뤄집니다. 참가자나 심사위원의 의표를 찌르는 반전의 묘미를 살리는 편집의 기술도 자주 만나게 됩니다. 

 

편집에 능한 예능이라 하면 뭘 겨냥한 걸까요? 예능도 결국 이야기로 귀결되며 그 이야기가 재밌도록 하기 위해서 다양한 서사를 끌어내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뜻입니다. 요리계급전쟁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의 구도 내에서 다양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캐릭터와 가장 극적인 서사를 끌어내고픈 잠재의식이 꿈틀거리고 있었던 것.

 

시즌 1의 서사는 언더도그의 승리였습니다. 눈부신 활약에도 불구하고 백수저였던 에드워드 리가 준우승에 머물고, '닥치고 우승'을 목표로 달린 흑수저 요리사인 나폴리맛피아 권성준이 우승할 수 있었던 무의식적 진실이 거기에 있는 것 아닐까요? '창의적 요리? 난 그런 거 모르겠고 무조건 유명셰프의 명성을 무너뜨릴 것'이라는 다크호스의 등장과 우승을 바란 제작진과 그에 부합한 출연진 그리고 그에 조응한 심사위원의 심사결과라고. 

 

시즌2의 우승자인 최강록은 요리만 잘한 게 아니라 그 세계관을 누구보다 잘 꿰뚫어 본 출연자였습니다. 방송 내내 '세계관'이라는 표현을 많이 썼던 이유도 거기에 있었습니다. 알고보니 롤플레잉 게임 덕후였던 그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란 게임의 세계에서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까에 집중했습니다. 시즌1과 차별화된 시즌2의 서사가 어떻게 전개될지에 초점을 맞춘 전략을 세웠을 뿐 아니라 매 라운드 반전을 주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흑수저보다 더 혹독한 경쟁을 통해 살아남은 '히든 백수저' 2명 중 한 명으로 출연한 극적인 등장부터 그랬습니다. 무명 언더도그의 우승을 바라는 프로그램의 무의식적 욕망을 읽어내고 '흑수저 같은 백수저'라는 포지션을 선점하는 강수를 둔 것입니다. 또 '조림인간, 조림핑, 연쇄조림마'라는 자신에게 더씌워진 희화화된 이미지와 싸우기보다는 오히려 그런 대중의 눈높이에 충실한 롤 플레잉을 통해 결승전 진출에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맞수가 올라오는 과정을 관찰한 끝에 마지막 순간 과감히 조림을 버리고 남은 재료를 갖고 먹는 요리사들의 요리와 빨간 뚜껑 소주 한 잔이라는 '감동 요리'의 승부수를 던졌습니다. '그냥 하던데로 조림과 맛으로만 승부했더라면 요리괴물 님을 이기지 못했을 것인데 최종 미션이 '나를 위한 요리'였기에 우승할 수 있었던 것 같다'는 우승소감 자체가 왜 최강록이 우승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언더도그의 우승' 같은 감동적 서사를 끌어내고 하는 흑백요리사의 세계관을 꿰뚤어보고, 그 세계관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읽어낸 자기객관화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겁니다. 

 

최강록이 어수룩해보이는 외모와 달리 엄창난 전략가라고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반대로 게임을 즐기는 소년 같은 순수함을 갖춰기에 '게임의 규칙'에 충실할 수 있었다고 표현하는 게 더 정확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지금도 묵묵히 열심히 요리하는 전국의 수많은 요리사 중의 한 명일 뿐'이라는 발언 역시 최강록이 흑백요리사라는 매트릭스의 진정한 '소스 코드'를 읽어낸 네오임을 보여주는 사례 아닐까요?

 

그렇게 언더도그 요리사의 '더 원(The One)'이라 할 최강록에 걸맞는 노래를 생각해봤습니다. 음식이나 요리를 주제로 한 노래나 영화는 많은데 최강록에게 어울리는 노래를 찾기 힘들었습니다. 시골 쥐가 파리 최고의 요리사가 된다는 '라따뚜이'의 주제곡 'Le Festin'을 떠올렸지만 파인 다이닝 요리사에게 더 어울립니다. '베베트의 만찬'에 흘러나온 클래식곡들오 같은 이유로 탈락.

 

최강록이 일본 요리사니까 일본요리 영화나 노래 중에 뭐가 어울릴까 고민해봤습니다. 얼마 전 국내 첫 개봉한 제 최애 일본영화 '담뽀뽀'부터 떠올렸지만 최강록의 이미지와 어울리는 곡을 찾기 힘들었습니다. '리틀 포레스트'나 '카모메 식당' 같은 영화 속 노래들은 최강록의 잔잔하고 순수한 이미지와 어울리긴 한데 정작 요리와 관련된 가사가 없더군요. 그래서 고르게 된 곡이 일본 드라마 '심야식당'이 국내서 방송될 때 삽입곡으로 들어갔던 강산에의 '천천히 걷는다'입니다. 왜 어울리는지는 노래를 들어보시면서 각자 판단해보시기를...

 

 

 

밥 짓는 냄새가 나서
두리번 거린다
바삐 가는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걷는다.

매일 지나가는 길에서
오늘은 문득 그때
그 밥 짓는 냄새가 나
천천히 걷는다.

밥 냄새가 골목에 퍼지고
집으로 달려가던
그때 그 발소리가 들려와
천천히 걷는다.

친구들과 싸웠던 날도
밥 한 공기 가득 먹고 나면
잊어버리던 그때

천천히 더 천천히 길을 걷다 보면
잃었던 그 하늘을 다시 볼 수 있을까?
품었던 꿈들은 멀어지고 있지만
그리운 밥 한 공기 또 먹고 싶다

천천히 더 천천히 길을 걷다 보면
잃었던 그 하늘을 다시 볼 수 있을까?
품었던 꿈들은 멀어지고 있지만
그리운 밥 한 공기 또 먹고 싶다

밥 짓는 냄새가 나서 두리번거리다
바삐 가는 걸음을 멈추고 거기에 서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582o03B9aiU&list=RD582o03B9aiU&start_radio=1

 

 

-2026년 1월 18일(전날 보다 춥고 흐려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