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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안부곡

금강경을 대중가요로? '머무는 바 없이'에 반하다

 

 

소셜 미디어에서 우연히 접한 노래입니다. 대승불교의 주요 경전인 '금강경'의 핵심 내용을 요즘 우리말로 풀어낸 가사도 내공이 있고 멜로디로 중독성이 강합니다. 최근 불교의 가르침을 대중음악으로 풀어낸 경우를 종종 보는데 이 노래의 성취가 가장 인상적입니다.

 

'머무는 바 없이'라는 제목은 노래에서 되풀이 되는 '응무소주(應無所住)'를 우리 말로 풀어낸 겁니다. 대승불교의 주요 경전 중 하나인 금강경 후반부에는 네글자 씩 여덟글자가 짝을 이루는 사구게(四句偈)가 펼쳐집니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이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입니다.  '머무는 바 없어야 그 마음(깨달음)이 생겨 난다'는 뜻으로 중국 선불교의 창시자인 육조 혜능이 이 구절을 듣고 깨달음을 얻었다하여 유명해진 구절이기도 합니다.

 

노래 중간에 등장하는 '범소유상 개시허망'은 금강경 사구계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구절입니다. '무릇 있다고 여기는 것은 모두 허망한 것'이라는 뜻. 그 다음 가사 속 '약견제상비상'은 그 다음 구절이죠. '만약 모든 형상이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볼 수 있다면(若見諸相非相)'이란 뜻입니다. 

 

금강경은 산스크리트어 '와즈라(Vajra)'의 경전을 한자어로 옮긴 겁니다. 와즈라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벼락, 다른 하나는 다이아몬드. 그래서 벼락경으로도 번역할 수 있고 금강경으로도 번역할 수 있기에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금강석까지 절단할 수 있는 지혜를 담은 경전'이란 중의적 뜻으로 새깁니다.

 

노래는 바로 금강석을 잘라내는 벽력같은 지혜는 단단한 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형상과 이름에 집착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놓아줄 수 있을 때 나온다는 금강경의 핵심적 가르침을 꿰뚫습니다. 그러면서 금강경의 핵심 가르침들을 R&B 가사처럼 풀어놓는데 아주 제법입니다.

 

뮤지션 이름은 '알로뮤비'. 검색해보니 올해 12월 정규 앨범 '알로 명작 01'과 함께 여러 개의 싱글도 동시다발적으로 발표했네요. 목소리를 들어봤을 때 가수는 여럿인데 작사작곡은 딱 한명. 그 이진우라는 친구의 노래를 여러 가수가 나눠 부른 프로젝트 밴드로 추정됩니다. 

 

흥미롭게도 금강경과 반야심경 같은 불경 뿐 아니라 기독교성경(신약)의 '요한계시록(The Gosphel of John)'을 부제로 한 '빛이 와'와 성리학의 나라로 조선을 세운 '조선의 설계자-삼봉 정도전'이란 노래도 있습니다. 신데렐라, 백설공주, 라푼젤 같은 서양동화와 단군신화, 나무꾼과 선녀, 춘향전 같은 한국설화는 물론 소설 '사랑방손님과 어머니'는 물론 만화 '아기공룡 둘리'까지 패러디한 노래까지.

 

동서양의 고전과 한국 고전까지 꿰뚫는 상당한 내공의 싱어송라이터가 출현한 것 아닐까해서 살짝 소름까지 돋았습니다. 이적과 김진표 듀오의 '패닉' 데뷔 앨범을 처음 들을 때 이후 이런 느낌은 정말 오랜만이네요.

 

 

이름을 붙이는 순간

이미 멀어져

사랑이라 부른 것들은

대부분 기억이 돼

 

단단해 보일수록

손에 힘이 들어가고

잡으려는 마음이

먼저 부서져

 

사진 속 장면은 멈춰 있는데

지금의 나는 계속 바뀌어

붙잡고 싶던 것들은

항상 한 박자 늦어

 

있다고 믿은 것들

대부분은

잠깐 스친 그림자

 

범소유상 개시허망

잡지 마, 다 잠깐

범소유상 개시허망

단단할수록 깨져

 

응무소주, 응무소주

머물지 말 것

응무소주 이생기심

놓을 때 살아

 

나는 나라고 믿었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뀌고

확신이라 부른 말들은

상황 따라 방향을 틀어

 

주먹을 쥘수록 남는 건

손바닥의 통증

손을 펴면

바람이 지나가

 

끝이라고 믿은 자리엔

또 다른 문이 있고

옳고 그름도

시간 따라 옷을 갈아입어

 

범소유상 개시허망

이름 붙인 순간 멀어져

약견제상비상

놓아야 보여

 

응무소주, 응무소주

여기에도 저기에도 말고

응무소주 이생기심

흘러가도 돼

 

포기 말고

집착도 말고

잠깐

손을 펴는 쪽

 

범소유상 개시허망

다 지나가

응무소주 이생기심

지금만 살아

 

응무소주, 응무소주

잡지 말 것

붙잡지 않을 때

무너지지 않아

 

단단한 건

쥐라고 있는 게 아니라

놓아도

부서지지 않으라고 있는 거야

 

https://www.youtube.com/watch?v=bgUsd8z7uAQ&list=RDbgUsd8z7uAQ&start_radio=1

 

 

 

-2025년 12월 28일(영하 3도로 날이 조금 풀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