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넷플릭스 드라마 '은중과 상연'을 보면 여중생 은중이 '염세적'이라는 단어가 멋지다는 생각에 시도때도 없이 "나는 참 염세적인 것 같아"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지만 진짜 염세적인 인물은 그 단어의 의미를 알려준 상연의 오빠 천상학이었죠. 상학이 염세적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드라마 말미에 등장하기에 여기선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상학의 주제곡으로 이 노래를 썼어도 괜찭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노래와 어울리는 시인도 있습니다. 문학평론가 김현이 '극단적으로 비극적 세계관', '도저한 부정의 세계관'이라 평했던 시인 기형도죠. 그만큼 기형도 시에는 삶에 대한 짙은 환멸과 채워지지 않는 상실감이 넘쳐납니다. 은중은 입으로 떠들고 상학은 몸으로 실천한 염세적 세계관입니다. 그 근원적 원인은 기형도가 중학생 시절 노래 속 가사처럼 '오월의 눈부신 태양 아래/반짝이는 맑은 샘물처럼' 반짝이던 누이의 떠나감 때문이었습니다. 독실한 여고생 크리스천이던 기형도의 누이는 어느해 오월 믿고 따르던 교회 오빠에게 성폭행 당한 뒤 살해돼 참혹한 시신으로 발견됐습니다.
오랜만에 이 노래를 듣는데 요즘 뉴스를 접하는 제 마음을 반영한 노래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끄러운 세상 일들/이젠 듣기도 싫어'와 '어지러운 세상 일들/이젠 보기도 싫어'라는 가사 그대로. 다만 왜 그런지는 '내가 아직 어린 탓이겠지'라고 변명할 수 없는 나이가 돼버렸습니다. 노래하는 화자는 그 숨겨진 이유가 '그대 떠나감' 때문이라고 토로합니다. 하지만 정작 저는 그런 낭만적 핑계거리를 둘러대기엔 너무 많은 세월을 살아왔기에 더 서글퍼집니다.
'삶에 관하여'라는 거창한 타이틀의 이 노래는 1985년 발표된 '벌거숭이'라는 이름의 5인조 록밴드 데뷔 앨범이자 마지막 앨범의 수록곡입니다. 그 다음해 발표된 조동익-이병우 포크 듀오 '어떤 날'을 연상시키는 서정적 가사와 세련된 기타연주가 돋보이는 곡입니다.
작사작곡을 맡고 노래를 부른 이는 강인봉. '작은별가족'의 막내로 마이클 잭슨의 노래를 번안한 '나의 작은 꿈'과 마징가Z 주제곡을 부른 그 귀엽고 당찬 꼬마가수. 커서는 영화 '클래식'의 삽입곡인 '너에게 난 나에게 넌'과 영화 '선생 김동부'의 삽입곡인 '보물'을 짓고 부른 그 싱어송라이터죠.
이 노래를 발표할 당시의 강인봉의 나이가 열아홉. '삶에 관하여'라는 노래를 부르기엔 너무도 앳된 나이죠. 아마도 세상 두려울 게 없는 천둥벌거숭이의 마음가짐이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요? 그럼에도 여전히 그 노래에 공감할 수 있는 것은 지금 들어도 세련된 기타 선율 사이로 넘실거리는 상실감과 아쉬움, 미련과 후회라는 감정의 여백과 여운 때문 아닐까 합니다.
'벌거숭이' 시절의 음원은 LP 버전만 남아있어서 그런지 잡음이 좀 섞여 들립니다. 오늘 링크한 곡은 그가 1994년 결성된 기타 듀오 키키(KIKY)의 앨범에 재수록된 노래입니다. 벌거숭이 출신 기타리스트 겸 보컬리스트 강인봉과 키보드주자 곽윤종의 이니셜 첫 두 철자를 합쳐 만든 팀명 아닐까 합니다. 아쉽게도 키키 역시 딱 한장의 앨범만 내고 해체했네요.
거리엘 나서 봐도
혼자서 생각해 봐도
이렇게 알 수 없는 건
내가 아직 어린 탓이겠지
시끄러운 세상 일들
이젠 듣기도 싫어.
이렇게 후회하는 건
내게 남은 미련 때문이겠지
오월의 눈부신 태양 아래
반짝이는 맑은 샘물처럼
그렇게, 그렇게 아름답던 그 모습
이제는 사라져 갔나
지금은 내게 아픔만 남아
난 아무 말도 해줄 수가 없는데
그냥 그렇게 그냥 이렇게
살아가야만 하는 것인가.
어지러운 세상 일들
이젠 보기도 싫어
이런 마음은
그대 떠나감 때문이겠지
(10) [K-Pop 숨은 명곡 100선(79)] 삶에 관하여, Kiky : 1집, 판단중지 - 1994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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