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흔히들 야구는 '기세의 스포츠'라고 한다. 아니다. '형세의 스포츠'가 더 적합하다는 게 우민의 생각이다. 여기서 형세 (形勢)는 손자병법에 등장하는 형(形)과 세(勢)를 합친 표현이다.
형은 포메이션을 말하니 전쟁 전 어떻게 진을 구축하고 병력을 운용할지에 대한 전략을 말한다. 야구에 적용하면 시합전 라인업과 선발 투수를 정하는 것을 말한다.
그럼 세(勢)는 뭘까? 양측이 맞붙었을 때 발생하는 변화에 임기응변의 대응을 펼치는 전술을 말한다. 기동력이 강한 기병의 투입 시점을 정하고 예비병력을 언제 어디에 투입할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야구에 적용하면 시합 도중에 시합의 흐름을 읽고 어떤 투수를 언제 투입할지, 대타와 대주자를 언제 기용할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형은 페넌트레이트 장기전을 끌고가는 데 중요하다. 세는 토너먼트 단기전에서 승부수를 던질 때 중요하다. 형이 전략이라면 세는 전술이다. 형이 거시경제라면 세는 미시경제다.
대체적으로 군사전문가 및 야구전문가라는 시림들는 형에 집착한다. 군사전문가들이 잘 훈련된 정예 병력과 첨단무기를 다수 확보하는 것을 중시하는 것처럼 야구전문가들은 개인 역량이 뛰어난 선수들을 다수 확보하려는 것 역시 이 형을 강화하기 위함이다. 형의 운용에 강해야 페넌트레이스에서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건곤일척의 승부를 겨뤄야 하는 순간이 왔을 때는 세를 읽고 순발력과 임기응변을 발휘하는 것이 결정적 변수가 될 때가 있다. 선발투수를 언제 내리고 외양간 투수들을 어떻게 운용하며 대타와 대주자, 대수비를 언제 어떻게 기용하느냐가 그것이다. 야구에서 중요변수가 아니라고들 보는 감독의 능력이 빛을 발해야 하는 순간이다.
"야구 몰라요"와 "믿음의 야구"를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들은 형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 평균적으로 잘 치는 타자와 잘 던지는 투수를 기용했는데 해당 선수가 기대 이하의 퍼포먼스를 보일 때 "야구 몰라요"를 꺼내고, 계속 죽을 쓰다 반짝 빛을 발하면 "믿음의 야구"를 들고 나오는 이유다.
정치만 생물이 아니다. 야구도 생물이다. 이걸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의 전가의 보도가 "야구 몰라요"와 "믿음의 야구"라는 것이 우민의 생각이다. 그날 그날 선수들의 컨디션과 마인드를 읽어내고 세를 탈 줄 아는 진짜 프로라면 결코 입밖꺼내서는 안될 변명에 불과하다.
우민이 보기에 독수리들의 김경문-양상문, 문-문 커플은 형은 강하지만 세에 약하다. 그래서 팀을 페넌트레이스 상위까진 올려놓고도 가을야구에만 나가면 번번이 물을 먹는다. 반면 쌍둥이들의 염경엽은 고독한 승부사의 길을 걸어오면서 형과 세에 모두 강한 감독이 됐다. 장기적 페넌트레이스에선 네임 밸류를 어느 정도 중시하지만 단기적 승부처에선 당일의 컨디션과 마인드가 강한 선수를 적시적재에 투입할 줄 안다.
이번 한국시리즈에서 문-문 커플과 엽감독의 이런 차이가 명쾌하게 드러나지 않았나 한다. "야구 몰라요"와 "믿음의 야구"는 좋게 말하면 낭만 야구요, 정확히 말하면 "옛날 야구"다. 야구는 흐름을 타는 생물이란 생각에 형만큼 세를 중시하는 게 현대야구다. 문-문 커플의 야구가 엽감독의 연부역강한 야구를 이기지 못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고 우민은 생각한다.
-2025년 10월 31일(흐린 뒤 맑음)
#우민은 '어리석은 백성(愚民)'이자 '근심하는 백성(憂民)'인 동시에 '또 하나의 백성(又民)'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제 자신에게 붙인 별호입니다. 우민일기는 전지적 작가 시점에 가까운 '맨스플레인'에서 벗어나보자는 생각에 제 자신을 3인칭으로 객관화하려는 글쓰기 시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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