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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안부곡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에 톰 크루즈가 언급된 이유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세르지오 세인트 카를로스(베니시오 델 토로 분)가 톰 크루즈를 언급하는 장면.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지유가 뭔지 가르쳐줄까? 두려움이 없는 거야, 망할 놈의 톰 크루즈처럼(Like Tom Fkn Cruise)."
 
폴 토마스 앤더슨(PTA) 감독의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One Battle After Another)'를 보다가 빵 터진 대사. 주인공 밥 퍼거슨(리어나르도 디 캐프리오 분)이 납치된 딸 윌라(체이스 인피니티 분)을 구하기 위해 윌라의 가라데 사부인 세르지오 세인트 카를로스(베니시오 델 토로 분)의 차를 타고 갈 때 카를로스가 남긴 대사죠.
 
톰 크루즈 연기인생에서 흥행이 아니라 비평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은 출연작은 '7월4일생'과 함께 PTA의 세번째 장편영화 '매그놀리아'(1999)입니다. '매그놀리아'를 본 사람은 드물죠. 이 영화의 국내 개봉 때 관객이 1000명도 채 들지 않았을 정도니. 하지만`하늘에서 개구리가 비오듯 쏟아질 때 경악하는 톰 크루즈의 얼굴을 기억하는 분은  될 겁니다. 개봉당시 세기말 분위기와 기막히게 어울렸던 이 영화는 베를린영화제 대상인 황금곰상 수상작이 되면서 불혹의 나이던 PTA를 단숨에 거장 반열에 올려놨습니다. 
 
흥미롭게도 PTA는 크루즈가 주인공 이단 헌트 역을 맡아온 '미션 임파서블(Mission Impossible)' 시리즈의 감독을 맡고 싶어했다고 해요. 본인 성향과 전혀 어울려보이지 않음에도 말이죠. 그래서 여러 차례 톰 크루즈에게 러브 콜을 보냈는데 8편인 ‘파이널 레코닝’으로 사실상 시리즈가 끝나게 돼 낙담했다는 인터뷰 기사를 전에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더니 같은 해 개봉한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에서 톰 크루즈를 실명으로 등장시키며 찬사와 푸념이 뒤섞인 한 줄 대사를 천연덕스럽게 삽입한 겁니다.
 

톰 크루즈(외쪽)와 폴 토마스 앤더슨.[the playlist]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주역을 맡은 디 캐프리오는 올해 개봉한 '파이널 레코닝'의 톰 크루즈, 'F1, 더 무비'의 브레드 피트와 더불어 1990년대 이후 할리우드를 풍미한 미남배우죠. 그래서 이 영화의 개봉을 손꼽아 기다린 여성팬도 많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영화 속 디 캐프리오는 전성기 때 꽃미남이란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찌질해 보이는 반영웅으로 등장합니다.
 
한때 혁명동지였던 아내가 떠나고 남긴 열일곱살 딸을 키우는 오쟁이 진 남편. 젊은 시절 미국의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체제에 맞서 싸우는 아나키스트 혁명단체인 '프렌치 75'의 핵심단원이긴 했지만 멋진 액션영웅과는 거리가 먼 폭탄설치 전문가. 조직을 배신하고 떠난 아내로 인해 16년간 정체를 감추고 은둔생활을 하면서 술과 약에 찌든 소시민으로 전락한 사내입니다.
 
그러다 딸이 위험에 빠지자 동면상태였던 혁명정신을 다시 불러내기 위해 폭탄이 아니라 총을 들고 마치  '테이큰'의 리암 니슨이라도 될 듯 설치는 아비. 그런 사내에게 '미션 임파서블'에서 목숨이 아홉개라도 되는 양 곡예 액션을 펼치는 톰 크루즈라니...그때 아연실색하던 디캐프리오의 표정이 일품입니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무수한 영화가 오버래핑되면서도 예측불허의 내러티브와 액션을 전개합니다.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을 위해서라며 은행강도도 불사하는 '프렌치 75'(세계1차대전 때 프랑스군의 희망으로 떠오른 박격포이자 그만큼의 펀치력을 지녔다고 이름붙여진 진과 샴페인 베이스의 칵테일)의 조직원들은 캐서린 비글로우 감독의 '폭풍 속으로' 속에서 공화당 대통령 가면을 쓰고 은행을 터는 아나키스트 서퍼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사막을 가로지르는 도로 위에서 액션 장면은 코언 형제의 '레이징 아리조나'와 스티브 맥퀸 주연의 '블리트'가 만난 느낌입니다.
 
미국과 멕시코 국경지대를 무대로 한 핏빛 서사는 코언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원작자인 코맥 맥카시의 소설들을  연상시킵니다. 영화의 배경도시로 등장하는 미국 서남부의 가상도시 '박탄 크로스'라는 지명은 코언 형제의 영화 '밀러스 크로싱'을 연상시킵니다. 크로스 내지 크로싱은 모두 교차로를 뜻하죠.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에서 밥 퍼거슨 역의 리어나르도 디 캐프리오.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그러나 가장 대비되는 영화는 시드니 루멧 감독의 '허공에의 질주'(Running on Empty, 1988)입니다. 미국의 베트남전 참전에 반대하는 반전운동가로 네이팜탄 제조공장 폭탄테러도 불사한 뒤 FBI에 쫒기며 거주지와 이름을 바꿔가며 살아가는 일상에 지쳐가는 부모. 그들 사이에 태어났지만 제대로 된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피아니스트로서 천재성을 타고난 고등학생 아들 대니(리버 피닉스 분). 젊은 날의 이상과 현실 사이에 갈등하는 이들 남다른 가족의 가슴아픈 선택을 다룬 영화죠.
 
'허공에의 질주' 속 대니의 엄마(크리스틴 라티 분)는 엄청난 부자집의 상속녀. 그래서 아들이 꿈을 이룰 수 있게 물심양면 지원해주겠다는 대니 할머니의 제안에 흔들립니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에서 윌라의 엄마 퍼피디아(테야나 테일러 분)는 정반대로 골수혁명가 흑인집안 출신. 그래서 오히려 백인 명문대 출신의 밥 퍼거슨이 혁명가 기질이 부족한 얼치기라고 못마땅해 합니다. 
 
'허공에의 질주' 속 부모가 멸종 직전의 이상주의적 68세대 혁명가라면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부모는 혁명을 빙자해 자기욕망 채우기 급급하거나 일상에 찌들어 지리멸렬해진 한국의 얼치기 86세대처럼 느껴졌습니다. 이상주의적 혁명가 커플의 아들인 대니는 톡하면 터질 것만 같은 순수한 영혼을 지녔습니다. 반면 사랑도 이름도 명예도 남김없이 사라진 왕년의 혁명가 커플의 딸인 윌라는 세상물정에 밝습니다. 윌라도 우등생이긴 하지만 불안정한 엄마나 책상물림인 아빠와 달리 주제파악과 상황판단력이 뛰어납니다. 
 
그 대척점에 미국 주류라고 자부하는 WASP의 수호자 록조 대령(숀 펜 분)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개신교 앵글로 색슨 백인이 미국을 지배해야한다고 믿는 도널드 트럼프의 감시견이자 애완견 같은 인물이죠. 겉은론 순수함에 집착하지만 알고 보면 흑인여성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이중인격자. 혁명을 성욕의 해방으로 여기는 퍼피디아는 그에게 성욕과 출세욕을 동시에 채워줄 이중이 사냥감이었죠. 동시에 자신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을지 모를 팜 파탈이기도 했죠.
 
그 퍼피디아가 사라지고 16년 뒤 록조 대령은 승승장구한 끝에 별의 순간을 맞이 한고 퍼거슨 부녀가 16년간 쥐죽은 듯 은둔해 있던 박탄 크로스에 군대를 끌고 나타납니다. 거기엔 한국의 막장드라마 뺨 치는 이유가 숨겨져 있었으니...
 
 

영화 '허공에의 질주'에서 모자지간으로 출연한 리버 피닉스(왼쪽)와 크리스틴 라티.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영화는 도널드 트럼프가 장악한 현재의 미국이 '크리스마의 악몽'과 같다는 것을 기상천외한 액션영화의 문법으로 풀어냅니다. 동시에 처절히 패배하고 찢어진 깃발만 나부끼는 미국 진보진영에 그래도 일말의 희망이 남아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들이 정의롭고 멋진 히어로여서가 아닙니다. 그들의 상대가 위선과 허위의 화신들이기에 스스로 파멸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그 메시지는 이렇게 요약됩니다. 아무리 패배하고 좌절한 이상일지라도 68세대나 86세대가 그나마 그 명맥을 이어왔기에 대니와 윌라 같은 미래세대를 통해 다시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고. 따라서 '허공에의 질주'처럼 보이는 대니 부모의 분투가 결코 헛된 것이 아니라고. 또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에서처럼 비록 변질되고 타락했더라도 자유와 평등을 위한 싸움은 퍼피디아에서 윌라에게 이어지듯 대를 이어 계속될 것이라고.
 
그들의 분투는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돈키호테처럼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미션 임파서블'에 가깝습니다. 그렇기에 더욱 이단 호크라도 된 듯이 두려움없이 달려드는 이들이 많아져야 '미션 클리어'가 가능합니다. PTA이 왜 그렇게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에 집착했는지도 단번에 이해됐습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망할 놈의 톰 크루즈처럼(Like Tom Fkn Cruise)'이란 대사가 괜히 삽입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단순한 농담이 아니라 심오한 상징이었던 것입니다.  라디오헤드의 기타리스트 조니 그린우드가 음악감독을 맡은 OST에 정확히 그 대사를 딴 스코어가 들어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영호를 보면서 독창적 액션 영상만큼이나 현대음악적 요소가 가미된 그린우드 음악의 묘미도 놓치지 마시기를.

 
 
https://youtu.be/WBT7yJrP868?si=jPElevgwt6DxwJM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