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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안부곡

푸치니의 라보엠과 김수영의 ‘사랑‘

 
 
미국 재즈 색소폰 연주자 그로버 워싱턴 주니어의 이 연주곡을 들으면 무슨 노래가 따오르세요? 저는 ‘가고파’나 ‘그리운 금강산’ 같은 한국 가곡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다 뭐지? 뭐지? 하면 한참을 듣다가 겨우 떠올렸어요. 오페라 라보엠 중 ‘오 사랑스러운 아가씨(O soave fanciulla)'라는 걸.

다른 악기와 장식음 무엇보다 테너와 소프라노의 격정적 노래를 빼놓고 주선율만 들었을 때 생기는 이 낯설음은 뭘까요? 왜 오페라 역사상 가징 달콤한 사랑노래라는 평가를 받는 이 멜로디가 이토록 구슬프고 외롭고 애틋하게 다가서는 걸까요?

전에 말씀드렸듯이 비제의 '카르멘'과 더불어 푸치니의 '라보엠'은 기막힌 아리아가 가장 많은 오페라죠. 특히 1막 후반부에 주인공인 로돌포(테너)와 미미(소프라노)의 아리아 홈런이 3연타석으로 터집니다.
 
새로 이사온 미미가 촛불을 빌리러  이웃에 사는 로돌포의 집을 방문하는데 빌려준 촛불이 다시 꺼지고 바닥에 떨어진 열쇠를 주우려다 손이 마주칩니다. 그때 로돌포의 아리아인 '그대의 차가운 손'이 흘러나오죠. 미미의 아리아인 '내 이름은 미미'의 화답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첫눈에 사랑을 확인한 두 사람의 이중창인  '오 소아베 판출라'까지 폭풍처럼 휘몰아칩니다. 
 
김수영의 시 ‘사랑’은 이렇게 시작하죠. ‘어둠속에서도 불빛속에서도 변치 않는/ 사랑을 배웠다 너로 해서’.  라보엠 1막에서 로돌포와 미미가 어둠과 빛이 오가는 찰나의 순간에 사랑에 빠지는 순간과 기막히게 공명합니다.

둘은 그러나 찢어지게 가난합니다. 미미는 폐병에 걸리고 가난한 시인인 로돌포는 약값을 마련할 수 없죠. 그래서 로돌포는 미미에 대한 사랑이 식은 척 연기합니다. 부잣집 도련님의 정부라도 돼 목숨을 연명하기를 바라며. 뒤늦게 이를 눈치 챈 미미는 말없이 로돌포 곁을 떠나죠. 그렇게 자취를 감췄던 미미는 죽기 직전 다시 로돌포를 찾아와 자신의 사랑은 변하지 않있음을 고백하고 숨집니다.

김수영의 ‘사랑‘은 다음과 같이 이어집니다. ‘그러나 너의 얼굴/ 어둠에서 불빛으로 넘어가는/ 그 찰나에 꺼졌다 살아났다/ 너의 얼굴은 그만큼 불안하다’.

건강도 사랑도 풍전등화의 순간 로돌포의 가슴아픈 사랑을 확인한 미미의 얼굴이 그렇지 않을까요? 사랑하는 사람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위악을 부리면서도 자신의 연기가 들통날까 노심초사하는 로돌포의 심정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김수영의 ‘사랑’은 이렇게 마무리 됩니다. ‘번개처럼/ 번개처럼/ 금이 간 너의 얼굴은’.

로돌포와 미미의 사랑은 순금처럼 빛나는 사랑입니다. 첫 만남부터 사별의 순간까지 변함없는 사랑이니까요. 하지만 현실은 그 사랑을 순금 싱태로 두지 않습니다. 병마와 가난이란 시련의 번개가 내려치면서 그 순금에 금이 가고 불순물이 섞여 들어가게 됩니다.

마지막 순간 로돌포의 눈에 비친 미미는 금이 간 얼굴입니다. 홀로 병마와 싸우다 죽어가는 비극적 존재니까요. 미미 눈에 비친 로돌포 역시 금 간 얼굴일 수밖에 없습니다. 시링하는 사람의 목숨은 물론 사랑도 지켜주지 못한 절망적 존재니까요.

김수영의 시 제목은 ‘사랑의 비극’이나 ‘사랑의 운명’이 아닙니다. 그냥 ‘사랑’입니다. 그것도 변치 않는 사랑에 대한 노래입니다. 하지만 결말은 비극이고 절망입니다. 다시 말해 가장 완벽한 사랑도 비극과 절망으로 금가는 것을 피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최고조의 사랑의 기쁨을 노래한다는 평가를 받는 ’오 소아베 판출라‘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 주선율만 들어보면 이미 그리움과 슬픔, 한스러움이 내장돼 있으니끼요. 그로버 워싱턴 주니어의 이 연주곡이 제게 일깨워준 사랑의 역설입니다.

이 곡은 1999년 향년 56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급서한 워싱턴 주니어가 남긴 마지막 스튜디오 앨범으로 그의 사후 3개월 뒤인 2000년 3월 발표된 ‘아리아(Aira)’에 수록된 곡입니다. 이 앨범에는 우리에게 노래로 익숙한 올페라 아리아 선율을 재즈 색소폰 선율로 풀어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tSN4F-VdUsg&list=RDtSN4F-VdUsg&start_radio=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