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머티리얼리스트(Materialists) 리뷰
'머티리얼리스트(Materialists)'는 철학적으로 유물론자를 뜻한다. 만물의 본질이 정신이 아니라 물질에 있다고 믿는 사람. 그런 거창한 제목을 로맨틱 코미디 영화에 달았다고? 그런데 장르는 로맨틱 코미디란다. 그렇다면 유물론자를 뜻하는 아니라 물질적 가치를 우선시하는 사람, 곧 속물을 뜻할 터.
헌데 영화 시나리오를 쓰고 감독한 사람이 '패스트 라이브즈'의 셀린 송 감독이란다. '넘버3'의 송능한 감독의 딸. 초등학생 때 부모 따라 캐나다로 이민간 1.5세대 한인 감독. 이뤄지지 못한 첫사랑을 불교의 '전생(Past Lives)' 개념으로 풀어낸 재기 넘치는 데뷔작을 만든 젊은 여감독이 또다시 거창한 제목을 들고나왔다니 궁금해졌다.
그것도 한국계 배우 없이 할리우드 스타들로만 승부를 걸었다니 더 궁금해졌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의 히로인이자 1990년대 섹시 가이의 대명사 돈 존슨의 딸 다코타 존슨과 '캡틴 아메리카'로 유명한 크리스 에반스 그리고 아이폰 광고모델로 나설만큼 핫가이가 된 칠레 출신의 페드로 파스칼. 기럭지의 우월함을 간직한 간지나는 백인 배우들이다.
무대는 '패스트 라이브즈'와 같은 뉴욕. 배우 지망생이었다가 결혼정보회사의 성공적 커플매니저가 된 루시(다코타 존슨 분)는 자신의 고객이었던 커플의 결혼식에서 완벽한 배우자감을 뜻하는 '유니콘'을 만난다. 신랑의 형인 해리(페드로 파스칼 분). 부유한 대가족 출신의 금수저에 180cm가 넘는 키에 잘 생긴 외모, 재치 만점의 훈남이다. 루시는 그때 5년 전 헤어진 잘 생긴 남자친구와도 조우한다. 여전히 가난한 연극배우로 살아가면서 호구지책으로 케이터링 업체 웨이터 일을 맡은 존(크리스 에반스 분)이다.
커플매니저로서 사랑과 결혼의 전문가가 된 루시는 "연애가 어렵지 사랑은 쉽다"는 철칙을 지녔다. 배우자감을 찾기 위한 연애에는 수많은 변수가 개입하고, 극복해야할 문제도 많은 반면 운명처럼 찾아드는 사랑은 그냥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는 논리다.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런 운명적 사랑은 벼락 맞는 것만큼이나 어렵다는 것. 그래서 커플매니저들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결혼 적령기를 꽉 채운 루시 역시 배우자감을 찾는데 유니콘 같은 해리가 구애를 하고 나선다. 커플 매니저로서 자신에겐 언감생심의 대상이란 빠른 계산을 마친 루시는 그를 고객으로 삼을 생각뿐이다. 마음은 오히려 구질구질하게 사는 옛 남자친구 존을 향한다. 그렇다면 어려운 연애보다 쉬운 사랑을 선택하는 것 아닐까?
영화의 전체 얼개는 어려운 연애와 손쉬운 사랑을 저울질 하는 루시의 최종 선택에 맞춰져 있다. 하지만 진짜 흥미있는 장면은 해리의 구애를 커플 매니저의 논리로 방어벽을 치는 루시와 그를 돌파하려는 해리의 순발력 넘치는 대사의 밀땅이 펼쳐질 때다. 한때 커플매니저로 일한 셀린 송의 체험이 눈부시게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루시의 논리는 시체를 해부하는 법의학자와 손해와 보상을 계산하는 보험사정사의 그것처럼 냉철하다. 물질적 가치로 만사를 재단하는 머티리얼리스트의 화법이다. 하지만 그런 논법은 그러한 물질적 가치를 완벽히 갖춘 해리 앞에서 철저히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 돈 많은 사람 앞에서 돈의 논리로 이기려는 것만큼 어리석은 게 또 있을까?
머티리얼리스트로서 루시의 선택은 당연히 유니콘일 수밖에 없다. 고작 25달러 때문에 도로 위에서 대판 싸움을 벌이고 헤어지면서 자신이 머티리얼리스트임을 받아들였던 루시 아니언가. 또 해리의 집에서 첫날밤을 보낼 때 그와 키스를 나누면서도 눈은 온통 어마어마한 그 집의 구조와 값비싼 인테리어 훔쳐보기에 바쁜 여인네가 또한 루시다.
하지만 정작 수학공식처럼 어려운 연애에 성공한 루시는 결혼이란 결승점을 눈앞에 두고 자신의 고객들과 똑같이 흔들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왜 그럴까? 영화에는 그 이유는 설명되지 않는다. 루시의 선택으로만 그려진다. 그걸 루시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연애는 쉽지만 사랑이야말로 진짜 처치곤란의 난제이기 때문"이다. 연애는 비즈니스처럼 풀어갈 수 있기에 오히려 쉬을 수 있다. 반면 사랑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전 존재를 걸어야 하는 도박이기에 위험하고 힘들고 어렵다. 사랑보다 현실을 택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다. 동시에 그러한 선택에 미련과 회한이 짙게 남는 이유이기도 하다.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할 게 있다. 이 영화의 세 주인공인 루시와 존, 해리는 한국 신파극의 대명사인 '장한몽' 속 세 주인공의 변주라는 점이다. 이수일과 심순애 그리고 김중배다. 루시는 몇푼 돈 때문에 이수일을 버릴 수밖에 없었던 죄책감에서 자유롭지 못한 심순애다, 해리는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속물이라 생각하는 심순애의 열등감을 눈녹듯 녹여주는 멋쟁이가 된 김중배다. 그리고 존은 '김중배의 다이아 반지가 그리도 좋더란 말이냐'는 말을 자존심 때문이라도 결코 꺼낼 수 없게 된 21세기의 내성적 이수일이다.
뭐, 캐나다 이민자에 1980년대 후반에 태어난 셀린 송 감독이 '장한몽'의 구체적 내용을 모를 수도 있다. 설사 안다해도 대부분의 대중문화는 기존 클리셰의 창조적 변주라는 점에서 결코 탓할 바가 못된다. 오히려 한국인에게 익숙한 이수일과 심순애의 신파극을 21세기 뉴욕을 무대로 한 세련된 로맨틱 코미디로 재탄생시킨 이야기 솜씨에 갈채를 보내야하지 않을까. 한국인에게 익숙한 전생 얘기를 한국과 미국을 넘나드는 이뤄질 수 없는 사랑 얘기로 전환시킨 '패스트 라이브스'의 영리한 이야기술이 결코 일회성이 아님을 보여주는 영화다. 한국인에게 익숙한 이야기를 세계인이 좋아할만한 이야기로 새롭게 풀어낸다는 점에서 셀린 송이야말로 '한국적 세헤라자드'라 부를 만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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