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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r. Macguffin

왕가위 영화가 저주받은 걸작인 이유

영화 '2046'의 한 장면. ©디스테이션

 

 

1980년대 홍콩영화에 서극과 오우삼이 있었다면 1990년대~2000년대에는 왕가위가 있었다. 세기말과 세기초를 풍미한 왕가위 영화의 흡인력은 어디서 나올까?

 

도시의 청춘남녀의 외로움, 이뤄지지 못하는 사랑에 대한 애틋함, 감각적 영상과 심금을 파고드는 음악. 세기말적 감수성과 스파크를 이룬 이런 요소들이 왕가위 영화를 홍콩 뉴웨이브의 정점에 올려놓은 요소로 언급된다. 하지만 뭔가 결정적인 것이 빠져있다. 그 주인공들의 지독한 상실감의 원천에 대한 설명이다.


왕가위 영화는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는 1997년 전후로 집중 발표됐다. 반환된 이후 과거와 현재를 잃게 된다는 상실감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짙게 배일 수밖에 없다. 그중에서도 아비정전’(1990), ‘화양연화’(2000), ‘2046’(2004) 3부작은 1960년대가 배경이다

 

'아비정전'은 아예 1960년 4월 16일이란 특정 날짜까지 못 박고 시작한다. '화양연화'는 그런 1960년대가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라 선포한다. '2046'은 화양연화의 주인공 차우(양조위 분)가 미래에서 1966년 홍콩으로 되돌아와 기억을 되찾는 사연을 다룬다.

1960년 4월 16일 오후 3시라 특정 시간을 못박고 시작하는 영화 '아비정전'의 포스터. ©위키피디아

 

왜 1960년대 일까? 1958년 생인 왕가위는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나 다섯 살 때 부모를 따라 홍콩으로 넘어왔다. 그 어린 나이에도 억압적인 사회주의 사회와 달리 자유로운 홍콩의 공기에 깊은 인상을 받았을까? 엄밀히 말하면 부모세대의 시대라고 할 수 있는 1960년대에 대한 왕가위의 그 진한 향수는 어디서 연원하는 것일까? 

1960년대는 홍콩이 눈부신 경제성장으로 동양의 진주로 떠오른 시기였다. 당시 마오저뚱의 중국은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으로 정치경제적 혼란을 겪고 있었다. 그 경제적 탈출구로 자유무역지대인 홍콩의 존재감이 빛을 발하던 시기였다. 왕가위 3부작은 바로 그런 홍콩의 신화적 기원으로서 1960년대에 대한 영화적 탐구라 할 수 있다. 

 

가난한 친모(중국)에게 버려져 부유한 계모(영국) 손에 자란 아비(장국영 분)의 '서자의식'은 홍콩 역사의식의 초상이다. '화양연화' 속 차우와 수리진(장만옥 분)의 금지된 사랑은 중국 본토에선 금지된 자본주의적 삶에 대한 은밀한 욕망을 상징한다. 공식적으로 일국양제가 끝나는 연도를 제목으로 삼은 '2046'은 바로 그러한 홍콩의 기억과 추억이 중국 체제 아래서 철저히 지워질 것임을 암시한다. 

 

'화양연화'의 포스터. 차우(양조위 분)과 수리진(장만옥 분)의 투 샷이 인상적이다. ©디스테이션

 

 

2008년 시진핑 집권이후 홍콩은 '1960년대 3부작'이 예고한 운명의 궤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014년 홍콩의 우산시위가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하고 무산된 것에서도 여실히 증명된다. 

 

'화양연화'의 마지막 장면은 차우가 앙코르와트 유적 흙벽에 난 구멍에 밀어를 남기고 밀봉한다. 그 내용이 뭐였을까? "그대 다시는 화양연화의 시대로 돌아가지 못하리" 아니었을까? 

 

영화 '2046'에서 모든 것이 영원하다는 2046행 기차를 탄 사람들(홍콩인들)의 목표는 하나다. 읽어버린 기억을 찾는 것. 그러나 그 기차를 타고 되돌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일국양제가 영원할 것처럼 말하는 중국의 약속이 공수표이며홍콩이 과거 누리던 화양연화의 시절은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우회적 비판이다.

 

영화 말미 남자주인공 주모운(양조위 분)을 놓치게 된 백령(장쯔이 분)은 회한에 가득찬 목소리로 "예전으론 돌아갈 수 없을까?"라고 말한다. 그 말을 들은 주모운은 슬쩍 웃음을 흘리며 떠나간다. 그때 이런 자막이 흐른다.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미치 길고 긴 기차를 타고 아득한 밤, 흐릿한 미래로 향하는 것 같았다.'

 

이는 아비정전에서 언급된 '발 없는 새'의 운명과 공명한다. 바람 속에서 잠시 쉬는 것이 허용될 뿐 죽기 전까지는 땅에 발을 디딜 수 없게 저주받은 운명. 경제적 번영의 날개짓만 허용될 뿐 정치적 자유가 발디딜 공간이 허용되지 않는 홍콩의 슬픔 운명이자 '2046' 이후 왕가위가 더이상 영화를 만들지 못하고 있는 이유 아닐까?

 

영화 '2046'의 주인공인 삼류소설가 주모운(양조위 분)이 창작의 고통을 겪는 장면. ©디스테이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