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조현 이후 가장 인상적 대만 여배우로 누구를 꼽으시나요? 제게는 계륜미였습니다.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고 다 한 주걸륜이라는 걸출한 영화배우 겸 감독의 '말할 수 없는 비밀'(2007)에서 처음 보고 새로운 중화권 스타의 탄생을 예감했습니다.
영화 속 계륜미를 보고 누군가 그레이스 켈리를 평하며 했다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우아한 빙하 같지만 속에 뜨거운 화산을 품은 여인."
하지만 왕조현 때와 비교하면 대중의 주목도는 한참 낮았습니다. 계륜미의 출연작은 배우 데뷔작인 '남색대문'(2002)을 빼면 국내 거의 소개되지 않아 한동안 잊고 살았습니다. 올초 개봉한 '말할 수 없는 비밀'의 한국 번안영화를 보면서 계륜미의 존재감을 다시 확인했을 뿐.

그러다 제가 좋아하는 20대 여성싱어송라이터의 선두주자 중 한 명인 김필선의 이 노래를 접하고 올해 봄 오랜만에 계룬미가 출연한 영화가 국내 개봉했음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20대 때 제가 열광적으로 좋아한 '그랑 블루'와 '니키타' 이후 재능낭비형 감독이 된 뤽 베송이 대만에서 공동연출한 액션영화 '드라이브 인 타이페이'(원제 Weekend in Taipei)'였습니다.
오랜만에 계륜미도 보고 김필선의 노래도 감상할 겸 영화를 봤다가 허를 찔렸습니다. 불혹을 넘긴 계륜미는 말도 안되는 액션영화에서도 살아있는 농익은 연기를 보여줬습니다. '빙하 아래 화산을 감춘 여인' 그대로 였습니다. 하지만 총격신과 카레이싱 장면을 빼면 스토리가 너무 뻔해 계룬미 팬이 아니라면 굳이 보시라고 권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뤽 베송의 재능낭비만큼 계륜미라는 배우가 저렇게 소비되는 것이 참 안타까웠습니다. 제대로 된 멜로영화를 찍으면 제2의 장만옥도 될 여배우인데 말이죠.
김필선의 이 노래도 영화에 나오지 않더군요. 그제서야 깨달았습니다. 이 노래가 한국 개봉 홍보용으로 제작된 별개의 노래라는 것을. 총격전과 카레이싱을 앞세운 영화의 결과는 맞지 않지만 극중 계륜미가 연기한 조이의 내면을 영화보다 더 깊이 포착했습니다.
영화 속에서 대만 재벌가 안주인이 된 조이가 옛 사랑 존과 단 둘이 찍은 사진을 몰래 꺼내보는 짧은 장면에서 조이의 회한을 읽어냈더군요. 김필선 같은 감독만 만난다면 계륜미도 영하 속에서 패러디된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오드리 헵번처럼 빛날 수 있을 텐데 말이죠.
https://youtu.be/9-dTQQjIDYE?si=XgeqD5_no9M0cWfU
-2025년 7월 9일(땡볕 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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