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캐릭터 연기. 배우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배역을 관객이 예측하는 전형적 캐릭터를 그대로 연기하는 것을 뜻합니다. TV 드라마 속 주인공 주변의 병풍 같은 인물들을 맡은 배우들에게 요구되는 연기.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보다는 주인공을 돕거나 괴롭히기 위해 태어난 것 같은 뻔한 연기를 말합니다.
그럼, 그런 전형성에서 탈피하기 위해 필요한 게 뭘까요? '전사(前史)'를 쌓아올리는 겁니다. 대본에 등장하지 않는 그 배역의 과거 이력을 상상해 배우가 살을 붙이는 겁니다. 이런 장면에서 이런 대사를 하는 이유는 그가 과거 어떠어떠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라고 정당성을 부여하는 거죠. 그렇게 전사가 구축되면 캐릭터 연기의 천편일률성을 벗아나 좀더 생동감 넘치는 연기가 가능해집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만일 작가가 대본 외에 그 인물의 전사까지 함께 써서 제공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시청자들의 눈 앞에 펼쳐지는 연기가 '빙산의 일각'이 되는 효과를 발휘하게 됩니다. 드라마 속 모든 배역의 대사 한 마디와 연기 하나하나가 정교하게 짜여진 퍼즐처럼 딱딱 맞아떨어지게 되니까요.
박해영 작가의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모자무싸)가 보여주는 극작술의 경지가 놀라운 이유 중 하나입니다. 거의 모든 출연배우가 마치 '2회차 인생'을 사는 사람처럼 자신 인생이 반영된 농익은 대사와 연기를 펼쳐치는 이유도 거기에 있지 않을까 합니다. 8회차에서 주변인물이던 고박필름 대표인 고혜진(강말금 분)이 대형제작사인 최필름의 최동현 대표(최원영 분)의 갑질에 사자후를 토할 때 주연급 활약을 펼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모자무싸'에 대한 여러 게시물 중에서 가장 경탄했던 것은 극중 박경세(오정세 분) 감독의 액션영화 제목이 뜬금없이 '팔없는 둘째 누나'인 것의 단서를 찾아낸 것이었습니다. 박 작가의 전작인 '나의 해방일지'에서 아내와 이혼하고 두 누나들과 함께 외동딸을 키우며 살아가는 조태훈(이기우 분)이 "(부모가 모두 돌아가시니까) 두 팔이 없어진 거 같더라요. 지금 내 딸도 팔 한짝이 없는 것 같을까 봐"라는 대사를 건져내더군요. 저는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비로소 보였습니다. 정교한 퍼즐 뒤에 숨겨둔 작가의 큰 그림이. '모자무싸'의 여주인공 변은아(고윤정 분)는 아홉 살 나이에 배우인 엄마 오정희(배종옥 분)에게 버려진 친딸이라는 점에서 '팔없는 첫째 누나'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영화에서 타이틀롤을 맡은 여배우 장미란(한선화 분)은 오정희가 재혼하면서 얻게 됐지만 다시 아비 없이 자란 의붓딸이란 점에서 '팔없는 둘째 누나'에 딱 맞아 떨어집니다.
'팔없는 셋째'도 있습니다. 남자주인공 황동만(구교환 분)의 조카이자 황진만(박해준 분)의 잃어버린 딸인 영실이가 그에 해당합니다. 영실이는 결과적으로 어머니는 물론 아버지에게서도 버려진 셈이란 점에서 '양팔 없는 셋째'라 할 수 있습니다.
가장 사랑받아야 할 부모에게 버려진 아이, 그래서 그 누구보다 자신의 존재가치를 찾기 위해 분투할 수밖에 없는 인물들의 사연을 겹겹으로 쳐놓았으니 어찌 드라마가 탄탄하고 쫀쫀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미스터 맥거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모자무싸' vs '21세기 대군부인' (0) | 2026.04.29 |
|---|---|
| 마키아벨리 관점에서 본 '위키드' (0) | 2026.04.24 |
| 중드 '경경일상'의 제목과 내용 풀이 (1) | 2026.04.10 |
| 영화 '행복의 나라' 제목에 담긴 무의식적 진실 (1) | 2026.04.08 |
| '의천도룡기 2019' 이후 최고의 중국 드라마 (1) | 2026.03.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