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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맥거핀

마키아벨리 관점에서 본 '위키드'

영화 '위키드: 포 굿'의 두 주인공 글린다(아리아나 그란데 분)과 엘파바(신시아 에리보 분). 전자는 운명의 여신 포르투나의 총애를 받는 존재라면 후자는 비르투의 화신이라 할 수 있다. [유니버설픽처]

 
 
이번 보스턴 여행에 동행한 책은 마키아벨리의 '로마사논고'였습니다. 올해 안에 출간 예정인 '공화주의자 공자' 다음 책으로 마키아벨리와 공자를 비교하는 책을 준비 중이거든요.

마키아벨리의 책 중에선 '군주론'이 가장 유명하죠? 정작 그의 대표작은 '로마사 논고'입니다. '군주론'이 취업을 위해 군주론자로 위장하고 쓴 책이라면 '로마사논고'야말로 공화주의자였던 마키아벨리의 영웅본색이 담긴 책입니다.
 
예전엔 그런 마키아벨리의 영웅본색 파악을 위해 쑥 훑어봤습니다. 이번엔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다보니 마르크스 등장하기 전 진정한 리얼리스트 정치이론가였던 마키아벨리의 진면목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비르투(v virtù)와 포르투나(fortuna)에 대한 속깊은 통찰입니다.
 
"인생은 운칠기삼"이라 할 때 운이 포르투나라면 기가 비르투에 해당합니다. 현대인들은 포르투나를 미신 취급하며 비르투에만 초점을 맞추기 쉬운데 오십 넘게 인생을 살아보니 인생살이라는 게 비르투보다 포르투나에  좌지우지되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인생의 성패가 운에 좌우되는 걸 불공평하다 여기고 불평불만을 토로하기 바쁩니다. 하지만 오히려 니체가 갈파했듯이 그런 불운마저 기꺼이 껴안는 '아모레 파티'를 실천할 때 무의미해보이는 우리네 인생사에 진주 같은 의미가 창출됩니다. 
 
보스턴행 비행기 안에서 영화 '위키드: 포 굿'을 보면서 비르투와 포르투나의 이중주 변주를 발견하게 된 것도 그런 소확행 중 하나였습니다. '위키드: 포 굿'은 2024년 개봉한 '위키드'의 완결편. 뮤지컬을 영화화한 작품인데 전편보다 후편의 만듦새와 밀도가 훨씬 떨어지더군요. 하지만 나이 먹고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 좋은 점은 완성도에 상관없이 영감을 얻을 수 있다는 것.

 

'위키드'의 극적 재미는 '나쁜 마녀'와 '착한 마녀'라는 선악의 이분법 전복에서 나옵니다. 초록색 피부의 흉측한 외모로 '사악한 서쪽 마녀(Wicked West Witch)'로 불리던 엘파바(신시아 에리보 분)가 독립적이고 의로운 존재인 반면 금발에 푸른 눈, 백옥 피부를 지닌 글린다(아리아나 그란데 분)는 ‘착한 남쪽 마녀(Glinda the Good)'라지만 실력보다 평판에 전전긍긍하는 의존적이고 우유부단한 존재라는 반전의 설정입니다.

 

그렇다고 글린다가 '나쁜 마녀'인 것도 아닙니다. 오즈의 최고권력자인 마법사(제프 골드브럼 분)가 사기꾼이라는 것을 알게 됐으면서도 엘파바와 같은 용기와 결단력이 없어서 입을 다무는 대가로 기존 체제의 얼굴마담으로 살아가지만 속으론 엘파바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인물이니까요.

 

그렇다고 글린다가 '나쁜 마녀'인 것도 아닙니다. 오즈의 최고권력자인 마법사(제프 골드브럼 분)가 사기꾼이라는 것을 알게 됐으면서도 엘파바와 같은 용기와 결단력이 없어서 입을 다무는 대가로 기존 체제의 얼굴마담으로 살아가지만 속으론 엘파바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인물이니까요.

반면 엘파바는 실체보다는 겉모습, 능력보다는 인기에 집착하는 불공평한 세상과 맞서 싸우는 올곧은 투사의 길을 택합니다. 하지만 엘파바는 계속 인생의 쓴맛만 맛보면서 자신이 사랑한 사람들은 결국 모두 불행해진다는 깨달음에 도달합니다. 그래서 '운명을 사랑하라(아모레 파티)'에 나서게 됩니다. 세상의 지탄을 받는 악녀 역할에 충실하다가 인과응보로 소멸된 것처럼 위장하고 허수아비가 된 피예르와 함께 사랑을 위한 영원한 도피를 선택합니다.

세상을 구하려다 세상의 지탄받는 악녀로 사라질 결심을 한 엘파바의 고뇌에 찬 결단에 가장 크게 동요한 인물이 글린다입니다. 사라지기 직전 엘파바가 남긴 '출생의 비밀'을 무기로 마법사와 그의 괴벨스라 할 마담 모리블(양자경 분)을 소리소문 없이 권좌에서 밀어냅니다. 1부에선 저주받은 존재에서 진정한 마법 영웅으로 떠오르는 엘파바가 주인공이라면 2부에선 현실과 타협하는 범생이에서 노회한 내부혁명가로 변신하는 글린다가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엘파바는 실체보다는 겉모습, 능력보다는 인기에 집착하는 불공평한 세상과 맞서 싸우는 올곧은 투사의 길을 택합니다. 하지만 엘파바는 계속 인생의 쓴맛만 맛보면서 자신이 사랑한 사람들은 결국 모두 불행해진다는 깨달음에 도달합니다. 그래서 '운명을 사랑하라(아모레 파티)'의 자세로 세상의 지탄을 받는 악녀 역할을 충실하게 이행하다가 소멸된 것처럼 위장하고 허수아비가 된 피예르와 함께 사랑을 위한 영원한 도피를 선택합니다.

 

영화 '위키드: 포 굿'에서 글린다(아리아나 그란데 분)의 공중비행을 위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버블. 글린다가 추구하는 인기라는 게 물거픔 같은 것임을 상징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유니버설픽처]

 

 

마키아벨리의 관점에 서면 1부의 주인공인 엘파바가 비르투의 화신이라면 2부의 주인공인 글린다는 포르투나의 총신입니다. 엘파바가 마법에 통달해 지팡이를 타고 하늘로 박차오르는 순간 부르는 'Defying Gravity'는 마법나라 오즈의 권좌에 앉을 진정한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일깨웁니다. 하지만 중력의 법칙까지 거스를 정도로 확신에 찼던 엘파바도 가혹한 운명의 채찍질에 그 운명을 껴안고 세상 밖으로 몸을 던질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럼 그를 대신해 왕좌에 앉게 되는 글린다의 대표곡이 뭔가요? 어떻게해야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을 수 있는지 그 비결을 알려주겠다며 부르는 'Popular'입니다. 공화주의적 관점에서 '정치인의 인기'는 곧 포르투나의 입맞춤을 받은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유능해도 인기 없는 정치인은 발 붙일 곳이 없는 것이 정치판이니까요. 글린다가 누리는 모든 것, 그녀의 미모와 인기 그리고 그를 통해 인생의 성공가도를 달리는 것이야말로 포르투나의 선물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물론 2부의 글린다는 1부에서 'Popular'를 부르는 철부지 공주님이 아닙니다. 인기라는 것이 얼마나 거품 같은 것인지 또 진정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사랑받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아픈 것인지를 온몸으로 깨닫고 한층 성숙해집니다. 또 포르투나로부터 처절히 외면받았음에도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엘파바를 질투하고 시기하는 타락에 빠지기보다는 그런 엘파바를 인정하고 흠모하는 순정을 지켜냅니다. 그 결과, 엘파바만 읽을 수 있던 마법비서 '그리머리'를 독해할 수 있게 돼 명실상부한 오즈의 최고지도자가 됩니다.

그렇게 '위키드'는 세상이 운칠기삼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폭로합니다. 오즈 세계관에서 최고의 비르투를 소유한 엘파바는 결국 역사에 '사악한 서쪽 마녀'로 남은 반면 포르투나의 사랑을 담뿍 받은 글린다는 '착한 마녀'를 넘어 최고의 마녀 자리에 앉게 됩니다. 아무리 뛰어난 비르투를 지녔더라도 포르투나의 도움을 받지 못하면 정치적 성공을 거둘 수 없지만 포르투나의 총애를 받을 경우 적절한 비르투를 갖추면 최고 권력자가 될 수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미국은 세계 최초로 대중민주주의를 채택한 나라죠. 그런 나라에서 대중적 인기가 없는 정치인은 말짱 도루묵이 될 수밖에 없음을 혹독하게 그려낸 아동문학작품이 바로 '위키드'의 진면목 아닐까요? 그렇다면 원작소설을 쓴 작가 그레고리 맥과이어가 엘파바의 모델로 삼은 인물은 누굴까요?

그 자신은 투철한 공화주의자였지만 왕조체제가 일반화한 유럽에서 군주가 갖춰야 할 비르투를 여우의 교활함과 사자의 난폭함이며 '백성의 사랑을 받지 못할 바에야 두려움의 대상이 돼야 한다'고 냉혹한 현실을 폭로했함 마키아벨리. 그래서 '악의 교사'로 공격받고, '권모술수의 화신'으로 마녀사냥을 당해야 했던 그가 그중 하나 아니었을까요?

물론 마키아벨리는 올바른 통치는 비르투와 포르투나가 함께 할 때라고 갈파했죠. '위키드'에서 엘파바와 글린다가 이중창으로 부르는 'For Good'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감동적 사례 중 하나로 기억될 필요가 있습니다. 엘파바의 비르투와 글린다의 포르투나가 하모니를 이룰 때 인간은 더욱 성장하고, 세상은 더욱 좋아질 수 있음을 보여주니까요.

for good은 영어 숙어로 '영원히'를 뜻하지만 직역하면 '착함을 위하여'도 됩니다. 따라서 '위키드: 포 굿'도 '영원히 사악하다'와 '선함을 위해 악해지다'라는 이중적 의미를 갖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For Good'은 선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스스로 악인의 낙인을 영원히 뒤집어 쓰는 길을 택했던 엘파바의 선택이 살신성인임을 보여주는 노래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마키아벨리와 공자 관점의 크로스오버를 통해 우리는 배웁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 할 때 진인사(盡人事)의 대상이 비르투라면 대천명(待天命)의 대상은 포르투나라는 것을.

거기서 다시 감동적 깨달음에 도달합니다. 포르투나의 사랑을 받진 못했지만 평생 비르투를 갈고 닦기에 정진한 '고대의 마키아벨리' 공자와 '중세의 공자' 마키아벨리가 '아모레 파티'를 실천에 옮김으로써 모래밭 인생 속에서 진주 같은 통찰과 의미를 건져냈음을. 엘파바가 실천에 옮긴 그것이 바로 공자가 설파했던 살신성인(殺身成仁)과 다르지 않음을.
 

[나노 바나나 합성 이미지]

 
 

https://www.youtube.com/watch?v=CNDiEsDV4tg&list=RDCNDiEsDV4tg&start_radio=1

 
 
 
-2026년 4월 24일(낮기온 27도까지 치솟은 초여름 날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