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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맥거핀

'모자무싸' vs '21세기 대군부인'

'나의 아저씨'에서 박동훈(이선균)이 오랜 시간이 지나 해후한 이지안(아이유 분)에게 남기는 대사. [sbs]

 

 

보스턴 여행기간 화제가 된 한국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모자무싸)'와 '21세기 대군부인'을 좀 늦게 봤습니다. '나의 아저씨'의 작가(박해영)와 주연 여배우(아이유)의 맞대결이었지만 '모자무싸'의 완승이네요.

 

하려한 키덜트 드라마인 '21세기 대군부인'가 대중적 반응은 좀 더 뜨거울 수 있겠지만 연말과 내년 초 각종 드라마 관련 상은 '모자무싸'가 싹쓸이 하게 될 듯. 예전 tvN의 '나의 아저씨'와  jtbc의 '밥 잘 사주는 예쁜누나'가 맞붙었을 때도 그러했듯이. 

 

공화주의가 시대정신이 된 지금, 대한제국이 등장하는 대체역사물이라면 마땅히 그 대한제국의 문을 닫는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해야 할 터. 헌데 재벌2세와 대통령을 아무리 멋지게 그려봤자 '백마 탄 왕자님'만 못하다는 계산 아래 무리수를 남발하는 하이틴로맨스물에 불과하더군요. 왜들 그렇게 왕자님 신드롬에서 못 벗어나시는지...

 

"지안, 편안함에 이르렀나?"이라는 '나의 아저씨' 속 박동훈(이선균 분)의 질문에 "안이함과 매너리즘에 이르렀다"고 답하는 아이유를 보는 듯한 실망감을 맛봤습니다. 아니면 “이안대군(변우석 분)에 이르렀다"고 답하고 싶은 걸까요? '폭싹 속았수다'의 아이유는 도대체 어딜 간 건가요?

 

변우석은 키만 멀대같이 크고 연기력도 겨우 발연기를 면한 정도던데 여성들은 왜 그렇게 열광하는 건지. 아이유와 변우석, 두 사람 사이에서 케미라는 걸 발견한 분 계시면 연락 부탁드려요. 

 

[mbc]

 

 

'21세기 대군부인'이 위너들의 플렉스 파티라면 '모자무싸'는 루저들의 찌질함 환장 파티. 그럼에도 대사와 상황이 드라마를 보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같은 반전 가득한 공감을 안겨줍니다.

 

20년간 입봉 못한 영화감독 지망생 황동만(구교환 분)은 '나의 아저씨' 박씨 삼형제 중 영화판에서 20년을 굴렀지만 감독 데뷔작을 만들다 영화판을 떠난 막내 박기훈(송새벽 분)의 캐릭터를 발전시킨 인물. 기훈은 한때 천재소리를 들었지만 막상 영화를 찍으면서 자신이 재능이 없음을 깨닫고 연기력이 부족한 주연 여배우 탓만 하다 도망친 자신의 비겁함을 매섭게 자책하죠.

 

'모자무싸'의 동만은 아예 메가폰 잡을 기회도 못잡은 인물로 등장합니다. 함께 영화공부한 8인회 중 유일하게 영화판 일을 잡지 못한 루저이다 보니 온갖 기행으로 좌충우돌하는 돈키호테 같은 인물. 1회만 보면 찌질함의 종합선물세트 같은 민폐남으로 그려지지만 뒤로 갈수록 미워할 수 없는 매력을 선보입니다.

 

영화판 사람들이 그가 없을 때 "무능함의 끝판왕"이라고 씹어대지만 3회쯤 가면 의문이 듭니다. 그렇게 무능하고 뻔뻔한데 왜 8인회 멤버들이 무려 20년이나 견뎌줬을까요? 모두들 동만의 재능이 가장 빛난다 생각했기 때문 아니었을까요? 다만 그토록빛나던 재능이 빛을 못하는 것에 처음엔 무참함을 함께 느끼다가 망가져가는 동만을 수수방관하는 자신들을 합리화하기 위해 그를 일종의 액받이로 삼는 것.

 

박경세(오정세 분)와 황동만(구교환 분)의 맞대결은 찌질함의 랩배틀을 넘어 UFC급 격투를 선보인다. [jtbc]

 

 

그런 황동만을 상대로 대조적 인물 둘이 등장합니다. 8인회의 멤버로 동만과 가장 앙숙인 박경세(오정세 분) 감독과 동만의 진가를 알아본 영화제작사 PD인 변은아(고윤정 분)입니다. 박경세는 동만과 짝을 이뤄 찌질한 감정싸움의 UFC급 격투를 선보이고, 변은아는 그런 동만이 겪는 감정적 상처에 동변상련의 파드되를 펼칩니다.

 

황동만 역의 구교환 배우는 변우석에 비하면 키도 작고 그로테스크한 외모를 지녔지만 정말 기막힌 연기 차력쇼를 펼쳐보입니다. 특히 오정세 배우와 연기합을 보고 있노라면 '얼쑤'라는 추임새가 절로 나올 정도. '이 사랑 통역되나요?'에서 너무 뻔한 연기를 펼쳐 실망했던 고윤정 배우도 응축된 감정을 터뜨릴 때 절제미를 선보이며 진짜 배우로 성장한 느낌.

 

우리네 일상에서 겪긴 하지만 감추고픈 부정적 감정들을 긁어모아 인상파의 점묘화 같기도하고 추상표현주의의 액션페인팅 같은 예술적 경지를 펼칩니다. 와, 정말 드라마가 안 될 것 같은 이야기로 주옥같은 드라마를 빚어내는 박해영 작가는 진정 우리시대 최고의 드라마작가 아닐까 합니다.

박해영 작가는 또 자신의 개성을 지문처럼 드라마에 남기기로 유명하죠. 극중 황동만은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감독의 영화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를 떠올리게 하는 캐릭터죠. 그런 동만이 가장 좋아하는 단어가 '안온함'이라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겨울에 이불 덮고 귤 까먹으면서 만화책 보는 느낌의 한 100만배쯤 되는." 앞서 언급한 "지안, 편안함에 이르렀나?"와 기막히게 조응하는 대사 아닐까요?

 

천덕꾸러기 황동만(구교환 분)이 '뻘밭의 진주'임을 알아보고 아낌없는 응원을 보내는 변은아(고윤정 분). 본인 말대로 "얌전한 아이지 만만하고 약한 아이가 아니다"라는 점에서 소리없이 강한 내강자다. [jtbc]

 

 

P.S. 써놓고 보니 '21세기 대군부인'에 대한 평이 박경세 영화에 대해 비수처럼 꽂히는 황동만의 평이란 생각도 듭니다. 뭐 그래도 '21세기 대군부인'은 박경세 영화와는 달리 시청률이 고공행진을 하고 있으니 '악의 없는 농담'이라 여겨주시기를....

  

 

-2026년 4월 29일(전날 흐렸던 날씨가 맑게 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