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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안부곡

클라라가 브람스보다 슈만을 더 사랑한 이유, 봄밤

한지민 정해인 주연의 드라마 '봄밤'의 한 장면.[JS픽처스]

 

 

지금은 사라졌지만 대학로에 '슈만과 클라라'라는 카페가 있었지요. 학창시절 대학로 가서 커피 마실 때마다 찾는 곳이었지만 늘 이런 삐딱한 생각을 했습니다. '클라라는 남편인 슈만이 죽고 결국 브람스랑 바람났잖아. 차라리 '클라라와 브람스'가 더 어울리는 거 아냐?'

 

클라라는 재색을 겸비한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였던 반면 그보다 아홉살 많았던 슈만은 생전 피아니스트로서나 작곡가로서 크게 각광받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까칠한 성격의 평론가로 더 유명했죠. 이때문에 슈만의 피아노 스승이었던 클라라 아버지의 결사 반대해 법정 투쟁 끝에 겨우 결혼할 수 있었고, 피아니스트인 클라라의 수입에 의존해 결혼생황을 유지했습니다.

 

제 기억 속 슈만은 타건할 때 손가락 힘을 키우겠다고 모래주머니까지 달고 피아노를 치다가 손가락 이상이 왔고ㅡ 온갖 망상에 시달린 '찌질이'였습니다. 결국 조울증에 걸려 온갖 망상에 시달리다 라인강에 몸을 던진 끝에 2년 뒤인 마흔여섯에 숨을 거뒀구요. 아니 법정 투쟁까지 해가며 결혼했으면서 가장으로서 무능하면서 자살기도까지 하다니 참 무책임한 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브람스는 슈만의 제자였는데 사모님인 클라라를 사랑하게 됐고 슈만이 죽은 뒤 열네살 위인 클라라의 사랑을 갈구했습니다. 그래서 전 브람스와 클라라가 사실혼 관계였다고 착각했습니다. 알고보니 평생에 걸친 브람스의 짝사랑이었습니다. 슈만과 달리 브람스는 젊어서부터 '제2의 베토벤'이라며 대가 취급을 받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외모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클라라는 젊고 잘 나가는 브람스가 아니라 찌질한 슈만에 대한 사랑만 고집했을까요?

 

대학생 때 받은 장학금으로 클래식 작곡가들의 대표곡을 망라한 LP선집을 사서 쭉 들었습니다. 대부분 교향곡이나 협주곡, 소나타 같은 대곡 위주로 편성돼 있었는데 슈만의 곡들에 비해  브람스의 곡들이 웅장하고 더 깊이 있게 들렸습니다. 그래서 슈만에 대한 부정적 생각이 더 강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한예리와 김설진 주연의 영화 '봄밤'의 포스터 [월원영화사]

 

 

그러다 대략 슈만이 죽은 나이가 돼서야 슈만의 독일 가곡(리트)과 피아노 소품을 접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좋은 겁니다. 특히 '시인의 사랑'과 '여인의 사랑과 생애', '연가곡집' 같은 리트의 매력에 푹 빠졌습니다. 리트하면 슈베르트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슈만의 리트가 더 아련하면서도 농익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특히 120곡이 넘는 리트들이 슈만이 클라라와 결혼한 1840년에 작곡돼 ' 가곡의 해(Liederjahr)'로 불리기까지 하다는 걸.

 

그제서야 깨달았습니다. '아, 클라라가 사랑한 슈만의 진면목이 이거구나! 브람스가 소설가라면 슈만은 시인이었구나! 우리의 우아한 클라라는 물질적 허기를 채우고도 남을 시인의 낭만적 영혼을 사랑했던거였구나!'

 

'피아노의 황제' 리스트도 그런 슈만의 낭만성을 기가 막히게 포착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슈만의 짧은 리트를 피아노연주곡으로 편곡한 작품들을 많이 발표했습니다. 라이벌이었던 '피아노의 시인'이었던 쇼팽에 비해 부족한 자신의 낭만성을 슈만의 가곡으로 채우려 한 게 아니었을까요?

 

'슈만-리스트 가곡 시리즈'로 불리는 피아노 연작들 중엔 '헌정(Widmung)'이 가장 유명하죠.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곡은 따로 있습니다. 요즘 계절에 듣기 딱인 '봄밤(Frühlingsnacht)'이란 곡입니다. 바로 그 1840년 시인 요제프 아르헨도르프의 시들을 엮어 발표된 슈만의 '연가곡집(Liederkreis)' 열두 노래 중 마지막 노래를 피아노연주곡으로 편곡한 작품. 

 

'봄밤'은 봄과 함께 휘몰아치듯 스며든 사랑의 감정에 어쩔 줄 몰라하는 마음을 노래합니다. 재즈 올드넘버인 'Bewitched, Bothered and Bewildered'처럼 마법에 걸린 듯, 성가시면서도, 안절부절한 그 마음 그대로입니다. 특히 '봄은 너의 것'이라고 숲이 되풀이해 속삭인다는 대목이 인상적이죠.

 

리스트의 초절정 기교가 필요한 피아노곡은 슈만의 리트보다 훨씬 더 생동감 넘치면서도 아슬아슬한 사랑의 감정을 극대화시킵니다. 특히 러시아 출신으로 미국으로 망명한 전설적 피아니스트 요제프 레빈(1874~1944)의 레코딩 연주를 들으며 완전 매료됐습니다. 러시아에서 모스크바음악원 재학 시절 라흐마니노프와 스크라빈과 동급생이었는데 졸업할 때 수석은 레빈이었다더군요. 러시아혁명으로 독일로 망명했고, 다시 유대인이란 이유로 탄압받아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연주보다는 제자들 키우는데 주력했다는데  '봄밤'만큼은 레빈의 연주가 최고가 아닐까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NTcdbSGiTXA&list=RDNTcdbSGiTXA&start_radio=1

 

 

-2026년 4월 10일(아침부터 봄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