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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안부곡

'아스투리아스'라는 곡명에 숨겨진 출생의 비밀

스페인 최남단 안달루시아 지역에서 탄생한 플라멩코를 추는 무희. [https://www.hellehollis.com]

 
 
'아스투리아스(Asturias)'는 기타연주곡으로 유명합니다. 특히 스페인의 전설적 기타리스트 안드레스 세고비아의 기타 연주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죠. 3년 전 오늘의 안부곡으로 소개했던 크로아티아 기타리스트 아나 비도비치의 기타연주도 그중 하나였죠. 하지만 원래는 피아노 연주곡으로 작곡된 곡입니다.
 
스페인 피아니스트 이사크 알베니스(1860~1909)가 작곡한 '스페인 모음곡'(8곡) 중 5번곡입니다. 스페인 모음곡은 스페인을 구성하는 대표적 지역의 음악적 특징을 담아낸 국민음악의 하나죠.
 
유독 스페인 작곡가들은 이렇게 스페인의 지역적 특성을 모음곡으로 작곡한 경우가 많습니다. 바이올리니스트 파블로 데 사라사테(1844~1909)의 '스페인 무곡'(8곡)과 피아니스트 엔니케 그라나도스(1867~1916)의 '스페인 무곡'(12곡)도 그렇습니다. 사라사테와 그라나도스의 모음곡 중에는 '안달루시아(Andalucía)'가 가장 유명합니다. 반면 알베니스의 모음곡 중에는 '아스투리아스'가 가장 유명합니다.
 
아스투리아스는 스페인 최북단의 광역자치주이자 연합왕국인 스페인에서 가장 오래된 왕국이 탄생한 지역입니다. 무슬림에 정복되지 않고 기독교 전통을 지킨 지역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국가로서 스페인의 태고적 원형을 간직한 곳으로 여겨지곤 합니다.
 
반면 안달루시아는 최남단에 위치합니다. 세비야와 카디스, 그라나다가 위치한 남부 지역으로 이슬람문화의 영향이 가장 짙게 남은 동시에 정열적인 집시 음악과 플라멩코의 탄생지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아스투리아스가 N극이라면 안달루시아는 S극에 비견할 수 있을 겁니다.
 

현재의 스페인을 구성하는 17개 광역자치주. 북서부에 위치한 아스투리아스와 최남단의 안달루시아가 뚜렷이 대별된다. [위키피디아]

 
 
그럼 왜 유독 스페인에 이런 지역적 특징을 묶은 모음곡이 많이 작곡된 것일까요? 축구 종주국인 영국은 잉글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 4개 왕국의 연합국이죠. 영국에 필적할만큼 축구가 발전한 스페인 역시 연합왕국입니다. 크게 카스티야, 레온, 아라곤(카탈루냐), 나바라, 그라나다 5개 왕국의 연합체입니다.
 
이중 가장 중요한 양대 왕국이 레알마드리드로 대표되는 카스티야왕국과 FC바르셀로나로 대표되는 아라곤왕국입니다. 카스티야왕국이 이베리아 반도의 대륙성을 대표한다면 아라곤왕국은 지중해문화권으로 분류되는 카탈루냐를 대변합니다. 또 그라다다왕국이 남부 안달루시아를 대표한다면, 나바라왕국은 카스티야와 아라곤 그리고 프랑스의 삼각지대에 위치한 바스크 지역을 대변합니다.
 
그렇다면 가장 오래된 왕국인 아스투리아스는 어디에 속할까요? 레온왕국입니다. 아스투리아스왕국을 계승했지만 영토를 확장하면서 남부 레온지역으로 수도를 옮겼기 때문입니다. 레온왕국과 카스티야의 통일로 구성된 카스티야 연합왕국과 아라곤연합왕국이 1469년 결혼동맹으로 합쳐지고 이후 그라나다와 나바라까지 통합하면서 오늘날의 스페인이 형성됩니다.  
 
이처럼 다양한 문화와 전통이 뒤섞인 연방국가의 성격이 강하다보니 그 개별적 특성을 하나로 모으는 모음곡이 많이 만들어지지 않았을까라고 추론해봅니다. 다만 알베니스의 '아스투리아스'에는 역설적 비밀이 하나 숨어있습니다. 기독교 문화가 강한 북부 음악이 아니라 강렬한 집시풍 음악입니다. '아스투리아스'를 음악만으로 접한 사람들은 아스투리아스가 안달루시아 지역에 위치했을 것아라고 착각해도 무리가 아닙니다. 저 역시 예외가 아니었으니까요.
 

무슬림에 정복되지 않았던 스페인 최북단 아스투리아 지역의 풍경 [https://www.barcelo.com]

 
 
그럼 왜 이렇게 집시음악의 특징이 뚜렷한 곡 제목이 '아스투리아스'인걸까요? 알베니스가 생전에 발표한 스페인 모음곡은 '그라나다', '카탈루냐', '세비야', '쿠바(작곡 당시까지 스페인 식민지)' 4곡이었습니다. 그러다 알베니스가 죽고난 뒤 독일의 출판업자 호프마이스터가 알베니스의 미발표곡 4곡까지 추가해 '스페인 모음곡'을 재출간합니다. 이때 스페인 전역을 커버해야 한다는 생각에 카디스, 아스투리아스, 아라곤, 카스티야라는 제목을 마음대로 붙였습니다.
 
그러면서 플라멩코 리듬에 어둡고 슬픈 집시 풍 멜로디를 녹여낸 곡 제목에 엉뚱하게 '아스투리아스'를 마음대로 붙여버린 것. 실제 생전의 알베니스 스스로도 "이 곡은 나의 고향(카탈루냐)이나 북부가 아닌, 내가 사랑한 남부 안달루시아의 영혼을 담은 곡"이라고 했다니 기막힐 일이었습니다. 비유하자면 '진도아리랑'으로 작곡된 곡에 '정선아리랑'이란 제목을 붙인 격.
 
하지만 '아스투리아'라는 제목이 워낙 유명해져서 아예 바꿀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히려 곡명에 얽힌 그런 역설적 스토리텔링으로 인해 더 명성을 얻게 됐다고. 알베니스 스페인모음곡에는 지역명 외에 부제가 붙는데 '아스투리아스'에는 '전설(Leyenda)'이란 부제가 붙은 점도 그런 스토리텔링에 대한 다양한 상상력을 자극했다고 합니다. 정치적으론 스페인 북부 기독교 문명이 남부 이슬람 문명을 흡수 통일했지만 문화적으로는 남부 안달루시아가 북부 아스투리아를 삼켜버린 역설을 여실히 보여주는 일종의 전설로 받아들여진 것 아닐까요?
 
오늘의 안부곡으로 선택한 '아스투리아스'는 피아노곡도 아니고 기타곡도 아닙니다. 나윤선이 스캣송으로 소화한 재즈 넘버입니다. 이탈리아어로 기악곡을 소나타, 가사가 있는 성악곡을 칸타타라고 합니다. 그럼 나윤선의 '아스투리아스'처럼 가사 없이 목소리를 악기처럼 사용하는 성악곡은 뭐라고 할까요? 이탈리아어로 보칼리조(vocalizzo), 프랑스어로 보칼리즈(vocalise)라고 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dR9O3UMVqBE&list=RDdR9O3UMVqBE&start_radio=1

 
 

-2026년 3월 28일(봄날의 곰을 안고 구르고 싶은 날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