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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민일기

우리는 왜 요리 프로를 보면서도 인성을 따질까?

[넷플릭스]

 

 

 

'한국 사회는 사람들이 화려한 도덕 쟁탈전을 벌이는 하나의 거대한 극장이다. 한국 사회의 역동성과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스릴과 흥분은 항상 여기에서 유래한다. 사람들은 도덕을 쟁취하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며 필사적으로 자기선전을 하고 있다. 운동선수도 연예인도 동성애자도, 심지어 범죄자까지도 하나같이 공적인 자리에서는 도덕을 외친다. 경기 성적이나 노래 실력만으로는 평가받지 못하고, 자신이 얼마나 도덕적인가를 국민들에게 납득시킨 후에 비로소 스타가 될 수 있는 것이다....이것이야말로 도적지향의 본령이다.'

 

-일본사상가 오구라 기조의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 중 22쪽에서

 

 

'흑백요리사' 시즌 2 마지막회가 방영된 뒤 소셜미디어에 쏟아지는 글들을 보면서 우민의 머릿 속에 떠오른 구절이다. 요리경쟁 프로을 본 소감을 이야기하는 데 왜 그토록  요리 얘기보다 인성 얘기가 많은 걸까?

 

가요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우승하려면 노래를 잘 해야하고, 요리 경쟁 프로그램에서 우승하려면 요리를 잘 해야한다. 그런데 한국 시청자들은 노래나 요리 실력보다 참가자들의 태도와 품성, 인간됨됨이에 집착한다. 

 

참가자의 인간미 넘치는 서사를 중시하는 한국 예능프로에 익숙해진 탓일까? 아니면 도덕지향적인 한국사회의 유교적 밈 때문일까? 전자보다는 후자가 더 크게 작용한다는 것이 우민의 판단이다. 한국사회에서 뭔가에 대해 판단을 내리고 그에 대한 동의와 지지를 구할 때 도덕성을 선점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집단무의식이 작동한 결과라고.

 

예능프로로 잘해야 몇 시간 본 사람의 인성을 단박에 꿰뚫어 보는 게 가능할까? 몇몇에겐 적용가능할 지 모른다. 하지만 '흑백요리사' 시즌 2의 경우는 참가자가 100명이나 된다. 그중 예능 프로에 자주 출연한 백수저 요리사 몇몇을 제외하면 대부분 처음 본 사람들일 터. 그럼에도 시청자들은 그들에게 흑백 이분법적인 도덕 잣대를 들이대는 데 거침이 없다. 

 

지난 시즌의 '나폴리 맛피아' 권성준처럼 이번 시즌의 '요리괴물' 이하성은 자신감 넘치는 태도가 시청자들의 도덕지향성에 불을 질렀다. 또 저마다 맘에 든 요리사에 대한 인성 찬사와 경쟁자의 싸가지 없는 태도 지적에 바쁘다. 알고 보면 좋은 사람인데 악마의 편집으로 이기적이거나 독선적으로 비치게 됐다는 옹호의 글도 빠지지 않는다.

 

그런 분들에게 묻고 싶다. 인성이 나쁘면 요리를 못하나? 요리를 잘 하면 인성도 좋아지나?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이란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사람이 온다는 것은/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흑백요리사 시즌 2에 참여한 100명의 요리사 모두 그런 사람들 아닐까? 저마다의 사연을 간직한 사람들이 요리 실력 하나 믿고 참석한 것뿐인데 졸지에 살아온 인생에 대한 평가까지 받아야 하는 걸까? 요리도 잘하는 사람이 인품까지 훌륭하다면 금상첨화다. 하지만 비단을 평가하는데 꼭 꽃이 더해져야 할 의무는 없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도덕지향성의 본령이다'라는 오구라 기조의 통찰은 절반의 진실에 불과하다. 현실주의자인 오구라의 통찰 바닥에는 '한국인들은 실제론 도덕적이진 않으면서 도덕적인 체하기 바쁘다'는 냉소가 깔려 있다. 그러나 그가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도덕지향성이야말로 우민이 생각하는 '한국적인 것(Koreaness)'의 핵심과 맞닿아 있다.

 

'부당한 권력에 대한 집단적 항거'를 통해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뤄낸 유구한 역사다.  위선처럼 비칠지 몰라도 그런 도덕지향적 사회였기 때문에 한국에서 3.1운동과 4.19, 5.18, 6.10, 박근혜 탄핵과 윤석열 탄핵이 가능했다고 봐야 한다. 혁명이 발생한 나라는 많다. 하지만 한국처럼 도덕성을 비판하는 국민들의 평화적 시위로 정권교체가 이뤄진 나라는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다. 

 

현재도 그렇다. 권력자들의 노욕으로 수천 명의 국민이 목숨을 잃는 일이 벌어지고 있지만 그에 항거하는 평화 시위로 정권교체가 이뤄질 가능성은 극히 드물다. 우크라이나전쟁을 일으킨 러시아가 그렇고, 팔레스타인 전쟁을 일으킨 이스라엘이 그렇고, 반정부 시위를 벌이던 민간인들이 학살되고 있는 이란이 그렇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민주국가인 미국 역시 다르지 않다. 대통령의 독단에 의해 무수한 인권탄압이 자행되고, 심지어 무고한 시민이 공권력의 총탄에 목숨을 잃어 수많은 도시에서 항의시위가 벌어지고 있지만 대통령 탄핵이나 평화적 정권교체의 가능성은 무에 수렴한다.

 

왜 그럴까? 그들 나라에선 '도덕이 밥 먹여주냐'는 냉소적 견유주의와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냉철한 현실주의가 공고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한국과 같은 도덕지향성이 결여돼 있다. 한국에서도 그런 견유주의와 현실주의로 무장한 채 권좌를 찬탈한 세력이 있었다. 박정희가 그렇고, 전두환이 그렇다. 하지만 결국 비극적 몰락을 피할 수 없었고 그것이 역사의 교훈으로 국민들에게 깊이 각인됐다.

 

그걸 망각하고 광대의 칼춤을 추다가 범죄자로 전락해서도 여전히 '공적인 자리에서 도덕을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 윤석열과 그를 추종하는 세력이다. 그들은 오구라 기조보다도 '한국적 도덕지향성의 본령'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사회의 도덕지향성은 양날의 검으로 작동한다. 예능프로를 보면서도 출연자들의 인간됨됨이에 집착할 정도로 일상에서도 도덕쟁탈전이 벌어지는 것이 부정적인 한쪽 날이다. 집단지성에 의해 부도덕하다고 판단이 내려진 정권을 평화적 시위로도 무너뜨릴 수 있는 긍정적 한쪽 날이다.

 

이런 양면성은 브라이언 헤어와 버네사 우즈가 '다정한 것이 살아 남는다'에서 갈파한 옥시토신의 양면성을 떠올리게 한다. 헤어와 우즈는 보호본능을 자극해 '사랑의 호르몬'으로 불리는 옥시토신을 '어미곰 호르몬'이라고 부른다. 자신신의 보호 아래 있는 새끼 곰에겐 한없이 사랑스럽지만 이를 방해하는 존재에겐 무시무시하게 난폭한 존재로 돌변시키기 때문이다.
 
인간은 보노보처럼 사랑이 넘칠 떄도 있지만 침팬지처럼 난폭해질 때도 있다. 보노보가 천사라면 침팬지는 악마라 할 터인데 그 양자를 서성이는 존재가 된 이유가 바로 이 옥시토신 의존성 때문이라고 두 사람은 설명한다. 그래서 자기편이라 생각되는 존재에겐 천사같이 굴다가도 반대편이라 생각되는 존재에겐 악마처럼 돌변할 수 있다. '사랑의 묘약'이 '증오의 독약'으로 바뀌면 인종 종교 문화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같은 인간을 대량학살하는 제노사이드까지 벌어질 수 있다는 것. 그런 비극을 막으려면 적대적 대상이 우리랑 똑같은 인간이란 점을 계속 환기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

 

한국사회의 도덕지향성도 다르지 않다. 누구나 좀 더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게 만들고, 정치권력과 사회의 부패를 막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한다는 것은 잊지 말되 그 도덕적 잣대를 자신이 아니라 타인에게 적용할 경우 도덕적 인간이 아니라 도덕적인 체 하는 인간만 양산할 수 있다는 경계심을 놓쳐선 안된다. 특히 다른 사람을 대할 때 그보다 도덕적 우위에 서서 내려다보고 손가락질 하려는 무의식적 '도덕쟁탈전'에 나서고 있는 건 아닌지 스스로를 되돌아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실제론 도덕적이지 않으면서 도덕적인 체하는 도덕주의에 빠져 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있지 않을까라고 우민은 생각한다.

 

 

-2025년 1월 17일(맑지만 어제에 이어 공기 질이 좋지 않음)  

 

 

 

#우민은 '어리석은 백성(愚民)'이자 '근심하는 백성(憂民)'인 동시에 '또 하나의 백성(又民)'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제 자신에게 붙인 별호입니다. 우민일기는 전지적 작가 시점에 가까운 '맨스플레인'에서 벗어나보자는 생각에 제 자신을 3인칭으로 객관화하려는 글쓰기 시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