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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맥거핀

영화 '국보'와 재일교포 감독 이상일의 싱크로율

영화 '국보'의 한 장면. [미디어캐슬]

 
 
일본 영화 '국보'를 아내와 함께 봤습니다. 아내는 취향저격 작품이라고 했습니다. 가부키하면 허얗게 분칠한 남자들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그로테스크한 몽동작을 보인다는 점에서 중국의 경극만큼 비호감 장르였는데 영화를 보고 장면 장면의 아름다움에 홀딱 반했다며. 그토록 낯설던 일본 문화를 단숨에 사랑하게 만들었으니 참 대단한 영화라고 할 만합니다. 
 
제 감동 포인트는 좀 달랐습니다. 가부키의 아름다움이나 그 미학을 완성시키기 위한 가부키 배우들의 고군분투가 제 눈에는 다소 엽기적으로 비쳤습니다. 영화에선 최고 수준의 가부키 배우에 대해 '아름다운 괴물'이란 표현을 씁니다. 아름다운 괴물이 되려면 첫째 아버지를 잘 만나야 합니다. 가부키 명인 반열에 오른 아버지로부터 어려서부터 매일 이뤄지는 극한의 신체단련과 사람들 혼을 쏙 배놓는 연기력 훈련을 쌓아야 비로소 그 예명을 물려받을 수 있기 때문이죠.
 
영화의 주인공 기쿠오(요시자와 료 분)의 아버지는 야쿠자 두목입니다. 하지만 라이벌 조직의 기습에 살해되고 열다섯 나이에 천애 고아가 된 기쿠오는 천부적 재능을 엿보인 가부키 배우의 길을 걷게 됩니다. 재능에 열정이 더해지면서 친부자 간 계승이 불문률인 가부키 명배우의 자리를 꿰차고 다시 온갖 오욕을 견디며 가부키의 전통을 지킨 끝에 그 자신이 '아름다운 괴물'의 반열에 오르게 됩니다.
 
기쿠오는 이를 위해 '악마와 계약'까지 서슴지 않습니다. 사랑과 우정, 명예와 같은 자신의 삶에서 가장 나아종 지닌 것들마저 포기합니다.  어려서는 뭣도 모른 채 그냥 좋아서, 나이 든 뒤엔 할 줄 아는 게 오직 가부키니까 거기에만 매달릴 수 밖에 없는 '관성의 법칙'을 따른 것 아닐까요? 사랑도 우정도 육친의 정마저 잊고 '가부키 머신'이 되는 삶은 처연할지언정 결코 아름답다고 생각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감동적으로 다가선 것은 그런 기쿠오의 모습에 재일교포(자이니치) 출신인 이상일 감독의 삶이 오버래핑 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상일 감독은 혈통을 중시하는 폐쇄적 일본사회에서 조센징이라는 것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한국식 이름 석자를 내걸고 영화판에 뛰어들어 가장 일본적 소재로 1000만 관객의 신화를 써냈습니다. 일본에서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실사영화로 1000만 관객 이상이 든 경우는 '춤추는 대수사선 영화2'(2003)에 이어  '국보'가 두번째로 이미 '춤추는 대수사선'의 기록을 돌파했다고 합니다.
 
이상일 감독의 삶의 궤적이야말로 기쿠오 삶의 궤적과 닮은꼴입니다. 야쿠자 출신임을 드러내는 커다른 수리부엉이 문신을 등에 새긴 기쿠오가 가부키에 뛰어들어 국보급 장인이 된 것처럼 자이니치 출신의 이 감독도 가장 일본적인 예술장르인 가부키를 정공법으로 다룬 영화로 일본 영화계 최대 흥행신화를 써내고 있으니까요.
 
 

재일교포 영화감독 이상일 [나무위키]

 
 
'국보'가 제게 가져다주는 감동은 가부키라는 특수한 예술장르보다는 이방인, 국외자, 아웃사이더들이 겪어야 하는 설움, 소외감, 외로움의 보편적 정서에서 옵니다. 이는 광대와 동성애라는 이중적 비극을 짊어진 중국 경극 배우를 그린 '패왕별희'와 인생살이에서 절절한 한(恨)을 체현했을 때 비로소 득음(得音)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 한국 소리꾼의 특수성을 그린 '서편제'와 차별화되는 '국보'만의 독자적 미학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영화 '국보'에는 가부키 미학과 별개로 아름다운 영상미학도 여럿 만날 수 있습니다. 기쿠오의 아버지가 피습당하는 장면의 거울, 기쿠오의 맞수 슌스케(요코하마 류세이 분)가 가부키 장인인 아버지ㅇ 대역을 기쿠오에게 뺏겼을 때 현기증 나는 회전계단, 야쿠자 가문 출신임이 언론에 폭로돼 급전직하한 기쿠오가 린치를 당하고 난 뒤 옥상에서 홀로 가부키 춤 출 때의 노을빛.... 무엇보다 70여편이나 되는 가부키 전체 작품 중 영화에서 소개되는 작품은 대여섯 편이긴 하지만 그 어려운 몸동작을 구현해내기 위해 구슬땀을 흘렸을 배우들의 연기합을 끌어낸 연출력 또한 상찬 받아 마땅합니다.
 
영화를 보고 가부키에 관심이 생기셨다면 유용할 핵심 팁을 드릴까 합니다. 가부키(歌舞伎)는 17세기 초 도쿠가와 막부시절 일본에서 그 한자이름에서 확인되듯 춤과 노래, 연기가 종합된 공연 장르로 탄생했습니다. 영국에서 셰익스피어 연극이 무르익을 무렵입니다. 14세기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가면음악극으로 탄생한 노(能)가 귀족 장르로 종교극인 오라토리오에 가깝다면 가부키는 그보단 대중적인 오페라에 가까운 서민적 종합가무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가부키의 인기는 오늘날 팬덤 문화의 원조라 하만큼 대단했습니다. 하루에도 여러 편 공연되는 가부키를 보려는 관객을 위해 도시락문화가 발달했고, 무대 위에서 배우가 일부러 떨어뜨리는 손수건을 줍기 위해 난리가 벌어졌습니다. 또 뒷자리에 앉은 관객이 배우를 가까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무대에서 객석으로 길게 도출한 화도(花道)가 발명된 것도, 세계 최초로 회전무대가 도입된 것도 다 가부키의 산물이었습니다. 
 
이밖에 한국에서 애창곡의 의미로 쓰이는 '18번'은 본디 70여편의 가부키 작품 중에서 18편 가량 되는 특정 극단의 주요 레퍼토리를 뜻하는 용어입니다. 따라서 18번이라는 표현은 딱 한 곡만 뜻하는 게 아니라 여러 곡이라고 봐야 합니다.
 
한국 방송계에서 많이 쓰는 ‘마가 뜬다’의 마는 사이 간(間)자의 일본어 발음으로 정확히는 시간적 휴지나 공간적 여백을 예술적으로 형상화한 무대표현 기교를 말합니다. 가부키 배우가 공연 도중 아름다운 동작을 취한 채 한동안 조각상처럼 멈춰있는 ‘미에(見得)’를 펼치는 것이 그런 마의 하나입니다. 일본 만화나 애니메이션에서 멋진 동작이 펼쳐졌을 때 스톱모션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역시 '마의 미학'이 낳은 산물로 볼 수 있습니다.

 
'국보'의 엔딩곡으로 쓰인 '루미낸스(Luminance)'를 오늘의 안부곡으로 골라봤습니다. 루미낸스는 광원에서 나오는  빛의 밝기에 대한 척도의 하나로 '휘도'라고도 합니다. 영화에서 기쿠오가 가부키 무대에서 최고의 공연을 보거나 펼칠 때 무대 조명 사이로 보이는 벚꽃 같기도 하고 빛무리로도 보이는 빛의 환영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일본 작곡가 하라 마리히코(原摩利彦)가 작곡과 키보드 연주를 맡고 일본 4인조 록밴드 킹 누(King Gnu) 리드싱어인 이구치 사토루(井口理)가 노래를 맡았습니다. 
 
 
아아 여기는 아픔도 두려움도 없어
목소리도 사랑도 기억도 희미해져
 
이 몸에서 벗어나 당신의 곁으로
메아리치는 갈채와 축제의 음색이
이토록 부드럽게 울려퍼지고 있어
 
아아 투명한 빛에 녹아내
닿을 수 없는 당신과 하나로

그래 영원히 그저 가득 차서
지금 기쁨의 끝까지
 

 
https://youtu.be/cr5FkeMj8kU?si=sDGGKdvbR3ISnoy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