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가은 감독의 영화 '세계의 주인'을 보면서 이수진 감독의 영화 '한공주'(2014)가 생각났습니다. 약 10년의 격차를 두고 발표된 두 작품 다 성폭력에 희생된 여고생을 주인공으로 삼았다는 공통점을 지닙니다.
'한공주'는 성폭력 피해여성을 '걸레'리고 낙인찍어 2,3차 가해를 가하는 한국사회의 이중성을 비극적으로 고발합니다. '세계의 주인'은 성폭력 피해자에게 희생자다움을 강요하는 한국사회의 편견에 죽비를 내리칩니다.
'한공주'의 주인공 공주(천우희 분)가 너무도 여리고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라면 '세계의 주인'의 주인공 주인(서수빈 분)은 천방지축 십대소녀입니다. 영화 후반부 어린시절 겪은 상흔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전까지 카메라에 포착된 주인의 삶은 다큐멘터리에 가까울 정도로 우리네 십대 소녀의 초상 그대로입니다. 누구나 그렇듯 가족사의 아픔이 있고, 친구들과 장난 치다가 사고치기 일쑤고, 이성에 관심은 많지만 쉽게 마음을 주지 못하고, 미래의 진로를 생각하면 골치만 아프고, 억울한 일을 당하면 욱할 때가 있고...
어찌보면 너무도 평범한 주인에게 딜레마가 생깁니다. 옥살이를 마친 아동성폭행범이 다시 동네로 돌아오는 것에 반대하는 서명운동에 주인을 제외한 전교생이 서명합니다. 하지만 주인은 서명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 서명서에 들어간 문구가 목에 걸려서....
영화는 그렇게 세상과 주인의 양보할 수 없는 맞대결을 그려냅니다. 윤가은 감독은 다큐멘테리처럼 사실성 넘치는 영상에 미스터리 기법을 적용해 언뜻 사소해 보이는 것에 주인이가 왜 그토록 집착하는지를 박진감 있게 그려냅니다. 누군가에겐 상식이 누군가에겐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누군가의 동정이 누군가에겐 나다움의 포기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영화제목은 왜 '세계와 주인'이 아니라 '세계의 주인'일까요? 영화 속 주인이의 투쟁은 세상의 편견과 싸움으로 비치지만 결국 '나다움'을 지키기 위한 싸움입니다. 내가 누구고, 어떤 삶을 살아갈지를 결정하는 것은 나 자신이어야합니다. 세상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좌우되서는 안됩니다. 설사 누군가 다른 사람이 어떤 종류의 폭력을 휘둘러 그것을 훼손하려 하더라도 그런 고유한 '나다움'을 포기하는 순간 나는 누군가의 노예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영화에는 주인과 노예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다만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사냥' 칸타타 중 제9곡 '양들은 평화롭게 풀을 뜯고'만이 주요 장면마다 흘러나옵니다. 기독교적 세계관을 토대로 하느님의 뜻이 땅에도 이뤄질 때 평온과 안식이 함께 하는 순간을 그린 명곡입니다. 하지만 이 곡이 흘러나올 때의 장면들은 오히려 "하느님 왜 저희들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나요?"라는 질문을 던져 마땅한 장면들 아닐까 합니다.
평온과 안식은 세계의 본질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계는 힘과 투쟁의 공간이고 그렇기에 무심하거나 매정합니다. 그런 무심과 매정의 세계에 평온과 안식을 심고자 하고 심을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무엇으로? 믿음, 소망 , 사랑(또는 용서)의 삼위일체를 통해.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가 신의 몫이라면 믿음, 소망, 사랑의 삼위일체는 인간의 몫입니다.
영화 속 주인이뿐 아니라 주인이의 엄마(장혜진 분), 남동생(이해인 분), 아빠(김석훈 분) 그리고 주인이와 비슷한 일을 겪은 여성피해자들 역시 평온과 안식을 희구합니다. 물론 그들에겐 그게 너무도 힘들고 벅찹니다. 그래서 주인의 아빠처럼 현실도피를 택하기도 하고, 주인의 엄마처럼 남몰래 술에 의존하기도 하고, 주인의 남동생처럼 마술의 힘을 믿어보기도 합니다. 피해당사자인 주인이에게 그것은 나다움을 지키는 겁니다. 다른 평범한 십대소녀처럼 사소한 것에 까르르 웃기도 하고 투닥거리기도 하고, 사랑에 목말라하는 거. 그것들이 곧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임을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평범한 대다수 사람들도 성공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니 남다른 상처를 지닌 주인이와 주인의 가족들은 더욱 성공하기 힘들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것마저 포기해야 할까요? 세상의 동정어린 시선 그대로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고 회복할 수 없는 고통을 짊어지고' 간신히 목숨만 붙인 채 살아가야할까요? 아니면 한공주처럼 오욕을 씻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속죄양의 길을 걸어가야 할까요?
우리의 주인이는 세차게 고개를 젓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내색하지 않고 나다움을 지키고 살아가겠다고 말합니다. 물론 그 나다움에는 성폭력 피해여성이라는 점까지 포함됩니다.
엔딩장면에서 다시 '양들은 평화롭게 풀을 뜯고'가 흘러나올 때 관객은 비로소 깨닫습니다. 아무리 힘든 시련과 고통이 닥쳐도 평온과 안식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는 주인이와 같은 친구들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음을. 그것이 곧 믿음, 소망, 사랑의 실천임을.
조지아 출신으로 지금은 프랑스를 거점으로 삼은 피아니스트 카티아 부니아티슈빌리가 연주하는 '양들은 평화롭게 풀을 뜯고'입니다. 그러고보니 '세계의 주인'의 영화포스터는 이 연주곡이 실린 부니아티슈빌리의 피아노 소품 모음집(2014) 앨범 재킷 이미지에서 영감을 얻어 변용한 것 아닌가 싶네요.
https://www.youtube.com/watch?v=P4ao120_V4w&list=RDP4ao120_V4w&start_radio=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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