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BS 예능 '우리들의 발라드' 시즌2 홍보영상으로 얼굴을 가린 이 친구가 양희은의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를 부르는 걸 들었습니다. 열여섯 소녀가 어쩜 저렇게 처연하게 노래할까라는 생각을 했는데 본방을 보고 그 이유를 알아버렸습니다. 벌스(도입부)만 듣고 바로 웅성웅성하던 관객들이 노래가 끝난 뒤 박수가 나오기까지 한동안 정적이 감돌 정도였습니다.
그 가창자의 이름이 김소연이란 것을 듣고 싱어게인의 얼음공주 김소연이 떠올랐습니다. 싱어게인이 배출한 가수 중 제 최애가수. 무심하 듯 노래하다가 꼭 패자부활전을 거쳐 '얼지마, 죽지마, 부활할 거야'를 여실히 보여준 강철 멘탈의 가수였죠.
‘우발의 김소연’도 ‘싱어게인의 김소연’ 못지 않게 단단한 내공의 소유자 아닐까 합니다. '춘향전' 속 춘향이와 동갑내기 이팔청춘임에도 '철학을 노래하는 소녀'란 타이틀을 달고 나올 정도로 올되고 당찬 구석이 있으니까요. 사연을 들어보니까 고독과 철학을 곱씹을 수밖에 없었겠구나 하는 안쓰러움과 그게 또 인생의 자산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교차했습니다.
그러다 ‘철학을 노래하는 소녀’의 노래에 대해 걸맞는 답을 들려줘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선 외롭고 쓸쓸한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그 속에서 내면이 단단해지기도 하고 자신만의 개성을 길어올릴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내가 아닌 타자를 가여워하고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울 수 있게 되나까요.
일본에서는 그런 외로움과 쓸쓸함, 처연함을 못내 아끼고 귀하게 여기는 독특한 문화가 있습니다. 사물과 인생의 덧없음,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애틋한 슬픔을 뜻하는 ‘모노노 아와레(物の哀れ, もののあはれ)'라는 표현이 대표적입니다.
재패니메이션을 보면 벚꽃이 지거나 낙엽이 떨어지거나 노을이 질 때 등장인물이 조용히 그걸 음미하는 장면들이 많이 나옵니다. 모노노 아와레를 표현한 것입니다. 미식가들 중에 복어를 먹을 때 미량의 독을 넣어 그 오싹하고 짜리한 맛을 즐기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요?
‘와비사비(侘び寂び, わび・さび)’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와비(侘び)는 부족함과 궁핍, 소박함과 불완전함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미학적 태도를 말합니다. 공간적 부재와 결여를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는 거죠. 반대로 사비(寂び)는 시간적 쇠락으로 희미해지고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해 애틋함을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와비사비는 그 둘을 합쳐놓은 미학용어. 공간적으로 부재하거나 시간적으로 소멸해가는 것을 그리워하고 애틋해합니다. 동시에 거기서 애수를 느끼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자기애가 슬며시 작동합니다.
저는 나르시시즘을 경멸합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마저 대상화해 나르시시즘에 빠지는 와비사비보다는 덧없고 애틋하게 여기는 대상과 물아일체(物我一體)를 지향하는 모노노 아와레를 더 선호합니다. 모노노 아와레에는 "조사(달마)가 서쪽에서 오신 이유가 뭐냐"는 질문에 대한 당나라 때 선승 조주의 답인 ‘뜰 앞의 잣나무(庭前栢樹子)‘와 공명합니다.
많은 이들을 지금 여기 대자적 존재인 잣나무와 즉자적 존재인 나를 묶어주는 인연을 환기시키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이는 선불교(선종) 이전 경전불교(교종)의 관점입니다. 달마는 이미 교종이 성행하던 중국대륙에 선종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 찾아왔기에 이는 정답일 수 없습니다.
잣나무와 내가 내가 ‘지금 바로 여기’라는 연기적 조건으로 맺어져 있다는 것은 ‘경계를 갖춘 형상’으로 설명되는 상(相)에 얽매인 해석입니다. 반면 선불교에선 연기론으로 얽힌 상에 머물지 말고 더 깊이 존재의 근원인 공(空)까지 파고들 것을 주문합니다.
그럼 공은 뭘까요? 잣나무와 나를 구별짓는 상의 한계를 뛰어넘는 무한한 가능성이자 그 둘이 본질적으로 같다는 깨달음입니다. 양자역학적으로 말하면 그 둘 모두 우주의 티끌(원자)과 바람(우주에 작용하는 4가지 힘으로서 중력, 전자기력, 강력, 약력)으로 이뤄졌다는 물아일체의 자각입니다.
바로 ‘바람에 놀라지 않는 사자, 그물에 잡히지 않는 바람,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입니다. ‘깨끗함도 더러움도 없고, 늘지도 줄지도 않고, 발생하지도 소멸하지도 않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내가 아닌 타자를 이해, 배려, 포용하는 겁니다. 그럼에도 사랑하는 존재가 부재하거나 응답하지 않을 때 외로움과 쓸쓸함이 엄습합니다. 설사 사랑받는다 하여도 근원적 외로움은 해소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누군가 또는 뭔가를 사랑할 때 겪는 그 지독한 소외감을 통해 나만큼이나 그 누군가나 그 뭔가도 외롭고 쓸쓸하고 처연한 존재라는 사실에 눈뜨게 됩니다. 심지어 ‘이 큰 도시의 복판에 이렇듯 / 철저히 혼자 버려진들 무슨 상관이랴 / 나보다 더 불행하게 살다간 / 고호란 사나이도 있었는데‘라며 자기연민에서 벗어나 타인의 슬픔과 고통을 먼저 헤아릴 줄 알게 됩니다.
모노노 아와레가 지극해지면 ‘뜰앞의 잣나무’와 자신을 동일시할 수 있는 물아일체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물론 그게 자기연민에 빠지면 나르시시즘의 심화라는 주화입마로 빠질 위험도 있습니다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마음으로 노래를 한다면 자신의 불행을 전시하는 것밖에 안되기에 관객의 공감을 끌어낼 수 없습니다. 나의 슬픔과 불행을 타자 일반에 대한 연민과 공감의 동심원으로 확대해 가는 것, 그게 바로 철학을 노래하는 자세 아닐까요?
다시 또 누군가를 만나서
사랑을 하게 될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을 것 같아
도무지 알 수 없는 한 가지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일
참 쓸쓸한 일인 것 같아
사랑이 끝나고 난 뒤에는
이 세상도 끝나고
날 위해 빛나던 모든 것도
그 빛을 잃어버려
누구나 사는 동안에 한 번
잊지 못할 사람을 만나고
잊지 못할 이별도 하지
도무지 알 수 없는 한 가지
사람을 사랑한다는 그 일
참 쓸쓸한 일인 것 같아
사랑이 끝나고 난 뒤에는
이 세상도 끝나고
날 위해 빛나던 모든 것도
그 빛을 잃어버려
누구나 사는 동안에 한 번
잊지 못할 사람을 만나고
잊지 못할 이별도 하지
도무지 알 수 없는 한 가지
사람을 사랑한다는 그 일
참 쓸쓸한 일인 것 같아
참 쓸쓸한 일인 것 같아
https://www.youtube.com/watch?v=0DRZ26tZ7wk
-2026년 10월 8일(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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