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오이 유우 주연의 일드 'T셔츠가 마를 때까지'는 흥미로운 가정심리극입니다. 8부까지 봤는데 1부 마지막부터 재밌어지면서 매회 반전에 반전을 거듭합니다. 핵심은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이란 박인환의 유명한 시구를 전복하는데서 발생합니다.
매달 세번째 금요일마다 집 근처 코인세탁소에서 '밀회'를 즐기던 유부남과 유부녀가 같은 고속버스를 타고 가다 추락사고가 발생합니다. 다리 아래로 추락한 사고로 12명이 숨지고 1명이 실종되는데 사망자 중에 유부녀가 있고, 실종자는 유부남입니다. 두 사람의 배우자가 같은 코인세탁소에서 조우하면서 이같은 사정을 알게됩니다.
통념에 비춰보면 바람을 피웠다고 의심하기 충분합니다. 최소한 '정신적 불륜'은 된다고. 문제는 그렇게 단정하기엔 사고를 당한 배우자들이 가정에 충실한 사람들이었다는 것. 도대체 그들에겐 무슨 비밀이 있었는지 남겨진 배우자들이 추적하면서 끊임없이 롤러코스터를 타는 심리가 섬세하게 펼쳐집니다.
그렇게 7부 마지막회까진 치밀한 구성을 보여주다 8부의 엔딩은 뜨악. 다음 시즌을 위한 빌드업이긴 하겠지만 10년을 같이 산 부부가 서로 경쟁하듯이 비밀을 쌓아두고 있다는 설정은 좀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청춘스타였던 아오이 유우가 ‘아수라처럼’에서 처럼, 아니 그보다 훨씬 성숙하고 안정된 연기를 펼치는 것을 감탄하면서 봤습니다. 이제는 믿고 볼만한 연기자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녀의 또다른 주연작이지만 황당한 내용의 ‘가스인간’도 볼까 말까 고민하게 만들 정도^^
경탄스러운 것은 매우 일본적인 상황을 일본인이 아닌 사람도 공감할 수 있게 만든 점. 첫 번째는 혼네(本音)와 다테마에(建前)로 분열된 일본인의 심성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일상의 균열을 포착한 것. 두 부부 모두 상대를 극진히 아끼고 존중함에도 그런 겉태도(다테마에) 뒤에 감춰진 속마음(혼네)까지는 다 밝힐 수 없는 사정을 자연스럽게 그려냅니다. 부부 사이에도 프라이버시 존중이 중요하다는 서구적 메시지로 바꿔치면서.
둘째는 일본사회에 유독 많은 '인간증발' 현상을 다룬 점입니다. 프랑스 저널리스트 부부가 쓴 '인간증발-사라진 일본인들을 찾아서'를 읽어보면 1990년대 버블 경제 붕괴 후 연간 10만 명이 사람들이 실종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 중 85%가 채무, 사업실패, 실직, 낙방, 이혼으로 인한 자발적 잠적입니다. 드라마에선 직접 언급되진 않지만 '압력솥 사회'라 할만큼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으면서 혼네와 다테마에 간의 균열이 너무 커졌을 때 훌쩍 자취를 감추게 되는 것 아닐까요?

드라마를 보면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카게무샤(影武者‧1980)’가 떠올랐습니다. 풍림화산(風林火山) 전법으로 유명한 전국시대 무장 다케나 신겐을 닮아서 전장에서 그의 역할을 대신하던 도적 출신의 '그림자무사'가 신겐이 죽은 뒤 그를 대신하다가 정신까지 신겐화한다는 이야기를 아름다운 영상에 담은 작품이죠.
그의 손톱을 먹고 자란 쥐가 본체를 대신하게 된다는 한국 설화 '옹고집전'과 반대되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그 영화를 보면서 다테마에를 수행하다보면 혼네까지도 다테마에화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더랬습니다. 착한 척을 자꾸만 하다보면 착해지고, 영웅인 척 하다보면 영웅적 행동을 하게 된다고.
남성미 넘치던 구로사와 아키라의 그런 웅혼한 기상을 현대 일본에선 더이상 기대할 수 없게 된 걸까요? 'T셔츠가 마를 때까지'의 재미랑 별도로 그 작품에 포착된 현대 일본인의 초상에 안쓰러움을 느끼게 되는 이유입니다. 착한 남편 역할을 수행하다 문득 '잠수타기(잠적)가 취미'였던 자신의 찌질함이 드러날까봐 다시 잠수타게 됐다는 것을 변명이라고 둘러대고 있으니....
차라리 불륜을 저지르고 들통났을 때 잘못을 인정하는 게 더 어른스러운 선택이 아닐까요? 사라진 남편(마츠야마 켄이치 분) 그리고 그와 불륜을 저질렀을지 모를 여인의 진중한 남편(나카지마 아유무 분) 사이에서 시소를 타는 사츠코(아오이 유우 분)도 어른이 되다 만 것 아닐까요?
귀엽다는 뜻의 '가와이'를 추구하다가 '키덜트 사회'가 된 일본사회의 병리현상을 잘 포착한 멜로드라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최소한 다른 사람에게 폐 끼치면서 살지는 않겠다'는 태도가 오히려 더 정신적 폐해를 낳는다는 점에서 영국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가 말한 '위기의 역설'의 인류학적 사례가 되지 않을까요? 작은 위기를 회피하고 축소하려는 윤리적 태도가 오히려 더 큰 실존적 위기를 불러온다는.
'T셔츠가 마를 때까지' 는 통상적 모럴을 전복하면서 그런 통상적 모럴이 추구하는 사회가 오히려 병들어 있음을 고발하는 도덕심리극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미국 중산층 모럴 위기를 포착했던 '하워드 혹스 영화의 일본판'이라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드라마의 주제곡은 1987년 결성돼 40년 가까이 활동해온 일본 4인조 밴드 '스피츠'가 불렀습니다. 아, 스피츠는 희고 주둥이가 좁은 그 일본산 작은 견종을 말합니다. 그 스피츠처럼 가와이하면서도 맑은 사운드를 추구하는 밴드로 여겼는데 정작 그들이 부르는 주제곡의 가사를 음미해보면 드라마보다는 훨씬 진취적이네요.
어항이나 연못 속에서 블루베리처럼 달콤한 먹이를 받아먹으며 평온하게 살던 물고기가 운명의 상대를 만날 거란 기대를 안고 익숙하던 곳을 박차고 넓고 거친 바다로 헤쳐나가듯 낯선 운명의 실로 엮이겠다는 내용이니까요. 어쩌면 그 다음 내용을 암시하는 걸까요? 스피츠가 연주하고 부른 '낯선 실'이란 뜻의 '미시라누이토(見知らぬ糸)'를 함께 들어보겠습니다.
ブルーベリーみたいに甘いやつ
블루베리처럼 달콤한 것
夢でも味があるんだよ
꿈에서도 맛이 느껴져
思い出は 波を受け
그런 추억은 파도를 맞으면서
消えてくはずなのに
씻겨나가야 할텐데....
祭りのあとの淡い音
축제 뒤의 희미한 잔향
迷い込んだんだ いつの間にか
따라가다 길을 잃고 말았지, 어느샌가
君はまだ 気づかない?
너는 아직 눈치 못챘니?
場違いでも運命は
잘못된 곳일지언정 운명은
既に始まってるんだって
이미 시작됐다는 걸
見知らぬ糸が絡まり
낯선 실이 얽혀
新しい色に
새로운 색으로
今までないほど
지금까지 없었을 정도로
愛おしくて 編まれて
소중하게 엮여
薄い衣になる
얇은 옷이 되어
包み込まれていく
감싸여지네
泥の涙は隠して
진흙탕 눈물을 감추고
気軽な感動に溺れた
가벼운 감동에 빠졌어
濁りなき 望みだけ
더렵혀지지 않 소원만이
美しいと信じたけど
아름답다고 믿어왔는데
飼われた魚のように
사육된 물고기처럼
餌を待つ平穏なルーティンから
먹이를 기다리는 평온한 일상에서
跳ね上がり 抜け出して
뛰어오르고, 빠져나와
海原をひとり来たのさ 再び巡り会えるって
넓은 바다를 홀로 왔지, 다시 만날 거라 여기며
間違う糸はほどけて また焦が れて
잘못 엮인 실이 풀리고, 다시 그리워지네
明かされないなら
밝혀질 게 아니라면
ペテンでも 構わない
속임수라도 상관없어
ありのままになる
있는 그대로가 되어
少し強くなれる
조금은 강해질 수 있어
見知らぬ糸が絡まり
낯선 실이 얽혀
新しい色に
새로운 색으
今までないほど
지금까지 없었을 정도로
愛おしくて 編まれて
소중하게 엮여
水面に映る
수면에 비치는
光も 味方に
빛마저 내편으로 삼아
薄い衣になる
얇은 옷이 되어
包み込まれていく
감싸여지네
包み込まれていく
감싸여지네
https://www.youtube.com/watch?v=sBAv1wx4ghE&list=RDsBAv1wx4ghE&start_radio=1
-2026년 9월 11일(아침저녁 뿐 아니라 낮에도 완연한 가을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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