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들이 있었던 곳
정찬 지음
246쪽 1만8000원 말하는나무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인간 실존의 3단계를 설파했다. 미학적 인간, 윤리적 인간, 종교적 인간이다. 미학적 인간은 감각과 욕망에 충실한 인간이다. 윤리적 인간은 그 감각과 욕망의 허망함을 넘어서기 위해 보편적 이성에 기초한 책임윤리에 투철한 인간이다. 종교적 인간은 이성의 한계를 자각하고 신성으로 도약하려는 인간이다.
1980년 5월의 '해방 광주'를 정면으로 다룬 이 소설의 서사는 양 갈래다. 첫째는 5월 18일 오후 4시부터 5월 27일 오전 10시까지 9박10일간 광주에서 벌어진 일의 실체를 전지적 작가시점으로 조감하는 것. 사실주의에 충실한 전략이다. 둘째는 그 열흘간 광주라는 공간에 있었던 인간군상의 심리를 그려내는 것이다. 정찬 작가가 이를 의식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여기서 한계상황에 처한 인간실존의 3단계를 펼쳐낸다.
첫번째 사실주의적 서사는 12.12 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한 신군부세력이 비판세력 재갈 물리기의 본보기로 광주를 어떻게 짓이겼는지를 생생히 보여준다. 또 야만적 폭력에 분개한 광주 시민들이 어떻게 저항해 '해방광주'를 쟁취했는지 그리고 그 내부에서 희망과 절망의 교차와 시민군과 정치조직의 형성과정, 항쟁파와 온건파 간 길항관계까지 드러낸다. 그리고 금남로 전남도청에서 최후 항쟁에서 진압군 피해가 거의 없었던 눈물겨운 이유까지 짚어낸다.
두번째 실존주의적 서사의 주인공들은 사실주의적 서사에서 실명 그대로 등장하는 인물들과 달리 별도의 이름을 부여받는다. 광주시민을 향해 총을 쏘고 그들 육체에 서슴없이 대검을 쑤셔넣는 공수부대원 강선우, 그에 맞서 자살공격도 마다 않는 시민군 김선욱, 항쟁파의 정치적 리더였던 노동운동가 윤상원을 모델로 삼은 박태민, 무고한 장애인청년과 임산부가 군인의 총탄에 스러져가는 것을 목도하고 신앙의 회의를 느끼는 신부 도예섭...
국가폭력이 무차별적으로 자행되는 한계상황에 봉착한 이 네 사람은 키에르케고르의 3단계 인간실존에 대응한다. 베트남전 참전용사 출신으로 무차발적 폭력의 섬뚝한 쾌감에 눈 뜬 강선우와 한국사회의 노동착취 구조에 대한 저항의 몸짓으로써 죽음마저 감내하려는 김선욱은 육체적 감각에 충실한 미학적 인간이다. 강선우는 그후에 밀려드는 죄책감을 씻어내기 위해, 김선욱은 해방광주의 도래로 찾아든 차별없는 일체감에 취해 금남로라는 이름의 '타나토스의 길'을 선택한다.
반면 학생운동권 출신인 박태민은 책임윤리와 정치적 존재다. 5.18 배후에 작동하는 신군부의 추악한 권력욕과 세계제국으로서 자유와 정의보다 국익을 앞세운 미국의 뱃속을 꿰뚫어 보면서 해방광주와 거기서 스러져간 영혼들을 그 추악함과 부당함을 고발하기 위한 '돌뿌리(스캔달론)'으로서 삼고자 한다. 또 스스로 무자비한 국가폭력 앞에서 왜곡보도를 일삼은 언론과 침묵하거나 외면한 지식인들을 양심과 역사의 재판정에 세울 '진실의 등불'을 밝히는 심지가 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도예섭 신부는 극한상황에서 감성과 이성을 뛰어넘어 신성으로 도약하는 종교적 인간을 보여준다. 국민을 보호해야할 국가권력이 국민을 무차별 학살하는 것에 경악하고 그런 한계상황 앞에서 무력했고 비겁했던 자신에 대한 죄책감에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른 예수를 따르는 마음으로 사제복이란 '갑옷'까지 벗고 진압군의 총알받이가 될 게 뻔한 금남로에 오른다.
그것은 현실을 부정하고 거부하기 위해 죽음을 택하는 타나토스의 길이 아니다. 역사의 죄인을 심판대에 세우기 위해 진실의 등불을 밝히려는 이타적 자살도 아니다. 승리와 영광을 상징하는 야자잎을 흔들며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때의 예수의 길이 아니라 무고한 어린양들을 희생시키는 인류의 죄를 일깨우기 위해 예수 스스로 희생양의 길을 걸어간 '십자가의 길'이다. 그렇기에 그 길은 곧 '부활의 길'이다.
"주님은 인간의 죄 때문에 살해되었습니다. 그 죄를 인류의 눈앞에 드러낸 것이 십자가였습니다. 주님의 육신이 부활하듯 주님의 십자가 역시 시간의 신비 속에서 끊임없이 부활해왔습니다. 우리가 백주의 거리에서 보았던 희생은 죄를 드러내는 십자가였습니다. 그 십자가를 죽음의 세력은 은폐하려고 합니다. 보지 못한 자들이 영원히 보지 못하도록 거짓의 형상을 만들고 있습니다. 도청의 젊은이들은 깨닫고 있었습니다. 거짓의 형상을 깨뜨리는 유일한 무기가 골고다언덕의 십자가임을. 도청이 그리스도의 집인 까닭을 이제 아시겠습니까?"
진압군의 무력진압이 코 앞에 닥친 5월 26일 밤 금남로 도청을 향하는 이유를 묻은 미국인 기자 테리 머턴의 질문에 대한 도예섭 신부의 답이다. 이 대목을 읽고도 5.18이 여전히 빨갱이들의 준동이라 믿는다면 진정한 기도교도라고 할 수 있을까? 오히려 5.18을 '제2의 부활절'처럼 신성하게 기려야 하지 않을까?
5.18를 전지적 작가시점으로 다룬 사실주의적 서사가 다소 불편할 순 있다. 하지만 이 소설이 20여년 전 5.18 광주의 전모를 거의 최초로 묘파한 소설 '광야'(2002)를 전면 개작한 것임을 감안하면 납득할 수 있다. 다만 실존주의적 서사에 여성주체가 빠져있다는 점은 못내 아쉽다. 시민군들에게 따뜻한 밥을 해주고, 진실을 밝히고 용기를 북돋기 위해 가두방송에 나서고, 피에타의 눈물을 흘려야했던 여성들 또한 '해방 광주'의 당당한 주역 아니었던가.

-2026년 5월 18일(초여름 햇살이 작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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