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의 역설
빈센트 베빈스 지음 박윤주 옮김
479쪽 2만7000원 진실의 힘

2010년 튀니지에서 시작돼 중동 전역으로 확산된 '아랍의 봄'을 필두로 2019녀까지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대규모 사회변혁운동의 70%가량이 실패했다. 오히려 해당 국가의 정치적 자유와 민주화는 계속 악화되고 있다. 그 원인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진보 성향의 미국 언론인으로 주로 남미 특파원으로 활약한 저자는 그 해답을 찾기 위해 브라질, 칠레, 튀니지, 이집트, 바레인, 예멘, 튀르키예, 우크라이나, 홍콩, 한국 등 10개국에서 사회변혁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심층 인터뷰했다. 이를 토대로 한국과 칠레, 우크라이나 정도를 제외한 변혁운동이 대부분 수포로 돌아가면서 정치적 상황이 더 악화일로에 놓여있다고 진단했다.
이 대목에서 이 책의 장점이 빛을 발한다. 세계가 등질화됐다는 세계화의 관점에 입각해 이들 국가의 상황을 일반화하는 것의 위험성이 조목조목 지적된다. 소셜미디어를 통한 인터넷혁명이 제3세계 국가에도 정치적 자유화를 가져다 줄 것이란 서구의 기대가 얼마나 신기루 같은 것이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냉전 종식 이후 자유시장경제 체제가 인류의 최종적 대안이 될 것이란 '역사의 종언' 식 목적론적 세계관에 끼워 맞춰진 '억지 춘향'이었다는 것. 특히 좌파가 주도하던 사회변혁운동이 자율화라는 미명 하에 조직화되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다가 민족주의적 열정이 강한 극우세력에게 주도권을 뺏기면서 배가 산으로 가게 된 역설적 상황을 짚어낸 점은 깊이 음미할만하다.
"1920년대 파시스트들이 사용한 전형적 수법이에요. 그들은 좌파의 요소를 가져와 그 의미를 뒤집습니다. 그들은 반체제적안 자세를 취하고, 반세계화운동의 미학을 채택하며, 당적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정치인들의 돈을 받고, 하나의 정당, 즉 지우마의 '노동자당'을 파괴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습니다."(266쪽에 나오는 브라질 좌파운동가의 발언)
저자는 이를 토대로 이들 변혁운동의 실패 이유를 기성정치권에 대한 불신으로 특정 조직에 의존하지 않고 불특정 다수의 자율적 시위에 의존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글로벌 사우스(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 동남아) 국가들의 경우 강고한 조직력과 위계질서를 갖춘 레닌주의식의 잘 훈련된 전위조직이 있어야 정권교체가 가능하다는 것.
21세기 자유변혁운동이 서구 68혁명을 이끌며 반정치와 문화적 저항으로 대표되는 신좌파(뉴 레프트)의 노선을 어설피 흉내낸 결과라면서 레닌과 마오쩌둥 식의 구좌파의 노선에 충실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다. 특히 특정 정치세력에 포섭죄지 않고 독립적이면서 유기적으로 연결된 다중이 새로운 정치변혁의 주체가 될 것이라는 안토니오 네그리 등의 이탈리아 자율주의 이론이 구체적 현실에선 탁상공론에 가깝다고 비판하는 대목은 예리하다.

하지만 기득권의 이익에 충실한 신자유주의를 물리치기 위해서 레닌주의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이야말로 시대착오적이지 않은가? 그러면서 구좌파들이 부르주아적 환상이라며 묵살했던 민주적 대표성을 강조하고 있다. 어불성설이 라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혁명적 볼셰비즘과 민주적 대의정치가 어떻게 공존할 수 있단 말인가?
저자야말로 21세기 현재라는 공시성에만 초점을 맞춘 탓에서 인류 역사를 꿰뚫는 통시성이 결여돼 있다. 민중 봉기로 인한 정권교체가 성공한 역사적 사례는 극히 드물다. 근대혁명의 본고장인 유럽에서도 1879년 프랑스혁명 정도만 성공했을 뿐이다. 저자의 모국인 미국에서조차 1950년대부터 시작된 민권운동은 70년이 지난 지금도 '흑인의 생명도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 시위 형태로 지속되고 있지만 오히려 인종차별의 퇴행이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저자가 성공적이라 꼽는 러시아혁명과 중국혁명은 지난 세기 저개발국에서 발생했다. 저자는 그것이 엄격한 기율과 위계질서를 갖춘 공산당이란 효율적 전위조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상찬한다. 하지만 그것이 가능했던 것 또한 제대로 된 정치시스템이 결여된 사회였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공산당이란 소수 엘리트에게 권력이 집중되면서 대다수 공산혁명은 실패한 것으로 판가름나지 않았던가.
저자의 좌편향은 이 책 도처에서 확인된다. 저자는 유독 우크라이나의 마이단(독립광장)시위와 홍콩의 우산운동이 우파 편향적이라며 냉소적 태도를 보인다. 그 지적 중에 충분히 음미할 내용도 있지만 이들 나라가 한때 좌파의 종주국이었던 러시아와 중국에 맞서기 위해 우파 이념에 경도됐다는 이유로 과잉 반응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럼 대안을 어디서 찾아야 할까? 그나마 저자가 가장 성공적이라고 평가하는 한국에서부터 그 단초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브라질과 칠레 등 남미국가에 경도된 저자는 한국을 심도있게 살펴보지지 않았다. 하지마 책을 읽을수록 한국이 얼마나 특수한 나라인지가 여실히 드러난다.
저자가 실패로 점철됐다는 21세기 변혁운동사에서 한국은 독보적 성취를 이뤘다. 그것도 한 차례가 아니다. 2016년 박근혜 퇴진운동과 2024년 윤석열 퇴진운동까지 두 차례다. 20세기까지 확장하면 1960년 4.19, 1987년 6.10까지 포함하면 부당한 정치권력에 대항한 평화적 민중봉기로 정권교체로 성공한 사례가 4차례나 된다. 그것도 저자가 말한 레닌주의적 전위조직이나 특정 정파와 결탁함 없이 수평적이고 자율적인 시민 참여로 이뤄낸 평화적 정권교체였다.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1919년 3.1 운동까지 이어진다
이런 눈부신 성공사례를 놔두고 실패 사례만 붙잡고 있으니 제자리 맴돌기를 못 벗어나는 것 아닐까. 당장 브라질과 한국만 비교해봐도 공통점과 차이점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민중봉기로 한국에서 우파였던 박근혜 퇴진을 불러왔을 때 브라질에선 좌파였던 지우마 퇴진이 일어났다. 이후 브라질과 한국에서 모두 좌파의 전술을 배운 우파가 대규모 시위에 나섰고 그 결과 한국에선 윤석열, 브라질에선 보우소나루라는 비전통적인 극우정치인의 집권이 초래됐다.
하지만 한국에서 국민 대다수가 재결집해 윤석열을 다시 탄핵했고, 브라질 역시 보우소나루의 재집권을 막고 한때 구속까지 됐던 룰라의 재집권이 이뤄졌다. 한국에 비해 브라질이 시행착오의 폭도 크고, 분열상도 크지만 국민의 선택이 변증법적으로 발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증좌 아닐까?
오히려 문제는 한국 브라질 칠레보다 경제 성장과 정치적 자유가 억압돼 수권능력을 갖춘 야당세력이 확립되지 못한 제3세계 국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저자가 지적했듯이 이런 내정의 취약성은 미국과 러시아 같은 강대국의 입김에 휘둘리는 상황이 조성되기에 더욱 순수한 민중봉기만으로 정권교체가 이뤼지기 힘든 결과로 이어진다. 이런 나라에서 레닌주의적 혁명으로 정권교체가 이뤄진다 한들 정치적 안정성과 국민의 삶은 더욱 위태로워질 뿐이다.

이 책의 근시안적 관점을 보완하기 위해서라도 대런 애쓰모글루와 제임스 로빈슨의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와 '좁은 회랑'을 함께 읽을 필요가 있다. 억압적 정치쳬제에서 고통받는 민중을 구하려면 민중봉기를 통한 단기적 체제전복보다 한국과 칠레, 브라질이 걸아간 것처럼 경제 성장을 통해 국가 역량을 키워내고 이를 토대로 정치적 자유를 끌어내는 장기적 발전노선을 앞세워야 한다.
이를 간과한 채 혁명을 통해 모든 것을 이루려 할 때 소련과 중국 같은 전체주의적 디스토피아만 도래할 뿐이다. 저자는 깨닫지 못하는 것 같지만 이 책의 원제인 'If We Burn' 에도 같은 통찰이 녹아 있다. 이는 2019년 홍콩 우산시위 때 내걸린 현수막 문구인 'If We Brun, You Burn with Us'의 앞부부만 딴 것이다. 영화 '헝거게임'에서 주인공 캣니스(제니퍼 로렌스 분)가 피지배자들에게 목숨 걸고 싸움을 벌이게 하는 서바이벌 게임을 즐기는 지배세력을 향해 "우리를 불태우면 당신들도 우리와 함께 불타게 될 것"이라고 한 대사를 원용한 것.
저자는 이런 모험주의적 발언이 결국 중국 공산당에게 '선을 넘은 메시지'로 받아들여져 우산봉기가 철저히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만일 함께 파멸하자는 '동귀어진(同歸於盡)'의 극단적 메시지가 억제돼야 한다면 좌우를 가리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닐까라는 말을 저자에게 돌려주고 싶다.
한가지 더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이 있다. 이 책에서 언급된 한국을 포함한 10개국 중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 치하에 있는 홍콩과 왕정국가인 바레인을 제외한 8개국은 모두 대통령제를 채택한 나라다. 신자유주의를 세상에 유포한다고 저자가 맹비난한 미국은 윤석열과 보우소나우의 원형과 같은 트럼프를 두 차례나 대통령으로 뽑은 나라다. 이쯤 되면 대통령제가 무슨 문제가 있길래 국민적 저항이 그토록 집중적으로 발생할까 한 번은 의심해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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