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창동 감독의 '가능한 사람'을 보고난 뒤 박찬욱 감독의 '어쩔 수가 없다'에 대한 내밀한 응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영화는 모두 외국계 자본의 M&A를 위한 구조조정으로 어느날 갑자기 실업자가 된 중산층 가정의 비극을 다룬다. 하지만 영상문법이나 스타일은 지극히 대조적이다.
박찬욱 영화가 그를 위악적 블랙코미디로 형상화했다면 이창동 영화는 예술이란 미명 아래 타인의 비극을 서사로 삼는 영화인의 위선에 대한 고해성사다. '어쩔 수가 없다'가 권위와 규범을 조롱하고 해체하는 다성적이고 카니발(carnival)적 영화라면 '가능한 사랑'은 영혼 깊이 침잠함으로써 뜻밖의 진실을 길어올린다는 점에서 모놀로그적이고 에피퍼니(epiphany)적 영화다. 쉽게 말해 전자가 사태를 극단으로 몰고가 관객을 혼비백산하게 만든다면 후자는 사태의 본질 깊숙이 파고들어가 관객이 외면하고픈 섬뜩한 진실을 끌어올린다.
'가능한 사랑'은 대기업을 다니다 구조조정으로 거리로 나앉게 된 호석(설경구 분)-미옥(전도연 분) 부부와 그런 그들의 비극을 다큐멘터리 영화로 담으려는 예지(조여정 분)와 그녀의 상류층 남편 상우(조인성 분) 부부의 불협화음과 공명의 순간들을 긴장감 넘치게 포착한다. 그 가운데 한쪽에선 귀족노조라 매도 당하고, 다른 한쪽에선 빨갱이라고 낙인 찍힌 샌드위치 신세가 된 탓에 자신들의 부당한 처지에 대해 제대로 된 항변도 못한 채 각자도생에 내몰린 노동자들의 실상이 실감나게 그려진다.
호석-미옥 부부는 구조조정을 피한 '산 자'와 달리 가혹한 운명을 피하지 못한 '죽은 자'다. 더욱이 그 부당함에 온몸으로 저항하다 본보기로 자본과 권력의 직격탄을 맞았다. 그로 인해 형제처럼 여기던 동료들에게서도 기피대상이 됐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의 재단에 바쳐진 무고한 희생양이나 다름없다. 특히 호석은 눈망울 가득 한을 품고 겨우 숨만 쉬고 살아갈 뿐 그 울분을 표출할 줄 몰라 어쩔 줄 모른다.
반면 예지-상우 부부는 그 제단의 희생제의를 최상단에서 관찰하는 사람들이다. 예지는 그들의 비극적 운명에 연민을 느낀다면 상우는 딱하긴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는 생각을 속으로 삭이는 쪽이다. 상우에겐 호석-미옥 부부의 고난을 초래한 구조적 문제는 강건너 불구경 하듯하면서 노동문제에 달려드는 아내 예지를 일종의 훈장처럼 여긴다. 상류층이라면 외면하기 마련인 골치아픈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이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양할 수 있기에.
예지-상우 부부는 그렇게 거리를 유지할 수 있기에 오히려 호석-미옥 부부의 희귀한 가치를 꿰뚫어볼 수 있다. 혹독한 시련을 겪을수록 더 영롱한 진주와 사리가 맺힌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예지는 호석이 자신의 다큐멘터리를 감동적으로 장식해줄 보석 같은 존재임을 간파한다. 또 자신을 스티브 잡스처럼 신비한 매력을 지닌 사람이라고 여기는 미옥의 순수함에 끌린다.

하지만 그런 관계 또한 착취의 또다른 형태다. 호석-미옥에게 너무도 힘겹고 벅찬 인생사가 예지-상우에겐 감독으로서 성공을 위한 디딤돌 아니면 부잣집 도련님의 흥미로운 채집거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호석과 상우는 그런 자신들 관계의 실체를 어렴풋이 예감하고 있었다. 예지는 그를 인간적 연민과 공감으로 포장하려 자신도 속일 정도의 매소드급 연기를 펼친다. 미옥도 그를 모르진 않지만 호기심 반 호감 반으로 예지-상우 부부에게 환대의 마음자락을 펼친다. 그리고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상우의 서해안 고급별장에 초청됐을 때 거리낌 없이 그에 응한다.
그리고 그 별장에서 그들 관계의 실체를 속속들이 간파하는 것은 가장 직관력이 뛰어난 미옥이다. 오랜 망설임 끝에 결국 예지 카메라 앞에 선 호석이 아내인 자신에게도 보여주지 않던 영혼의 치부를 드러낸 순가. 또 그 후유증을 견딜 수 없게 된 호석이 영혼의 토악질을 하는 순간을 몰래 숨어서 카메라에 담는 예지를 발견하는 순간. 미옥은 불현듯 감춰진 진실이 모습을 드러내는 에피퍼니를 겪는다. 예지가 자신의 남편을 감정적으로 벌거벗겼음을. 또 자기네 가족이 상우네 별장에 전시된 수많은 기이한 수집품 중의 하나라는 것을.
그리고 미옥은 선문답 끝에 해탈한 선승 같은 기행을 펼친다. 속세에 물든 예지와 상우는 결코 그 숨겨진 그 의미를 꿰둟을 수 없다. 느닷없다며 어리둥절해하는 관객도 상당수 있을 것이다.
이를 이해하려면 그에 앞서 이뤄진 예지-상우 부부의 대화를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예지는 호석이 자신의 다큐멘터리를 빛나게 해줄 보석 같은 존재임을 예감하며 이렇게 말한다. “이 세상에 딱 하나만 있는 사람 같다 .” 그러자 상우는 도통한 척 이렇게 답한다. “지금은 그렇게 보여도 알고 보면 뻔한 남자일 수 있어.”
영화를 다 보고 난 뒤 답해보길 바란다. '세상에 딱 하나만 있을 것 같은 남자'가 누군지, 또 '알고 보면 뻔한 남자'가 누군지를. 미옥의 기행은 그런 답을 끌어내기 위한 멋진 카운트펀치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미옥 역을 맡은 전도연의 연기는 베니스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에 실패한 것이 통탄스러울 정도의 명연기 아닐까 한다. 미옥 역의 전도연 뿐 아니라 호석 역의 설경구, 상우 역의 조인성, 예지 역의 조여정의 연기앙상블도 빼어나 2시간 45분의 러닝타임이 짧게 느껴질 정도이다. 더욱이 예지라는 캐릭터에는 모든 영화감독을 대표해 이창동 자신이 투영돼 있다는 점에서 통렬한 자기고발이 담겼다는 점에서 감독상을 수상 못한 것도 못내 아쉽다.
여기까지 이해했다면 왜 제목이 '가능한 사랑'인지에 대한 답은 스스로 구해보시기를 바란다. 노동자 계급과 자본가 계급 간 진정한 사랑이 가능하겠느냐는 식으로 돌아다니는 '뻔한 답'은 거들떠 보지도 말고. 대신 영화의 엔딩씬을 가득 채우는 달이 힌트가 아닐까 한다.
P.S. 눈물겨운 파업현장에서 자행된 야만적 공권력 개입을 고발하기보다는 그로 인해 야기된 노노갈등에 초점을 맞춘 것 같아 불편하다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야말로 달을 가리키는데 달은 안보고 손가락만 보는 격이라고 답하고 싶다. 세상 노동자들이 다 그렇게 숭고하기만 한다면 왜 파업이 끝난 뒤 트라우마가 있고 정신과 치료가 필요하겠는가?

'미스터 맥거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연기가 현실이 된 '이런 엿같은 사랑' (0) | 2026.08.17 |
|---|---|
| 'The Thing'에 대한 집착 빠진 '와일드 씽' (0) | 2026.08.11 |
| 앤 해서웨이와 '20년' (0) | 2026.08.10 |
| '오디세이'가 걸작인 이유 (0) | 2026.08.07 |
| 배가 산으로 간 영화, '호프' (1) | 2026.07.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