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디세이’의 핵심 키워드는 '죄의식'이다. 원작인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 숨겨져 있던 ’죄의식‘을 전면에 드러내면서 이를 수미쌍관하게 펼쳐낸다. 죄의식을 통해 헬레니즘의 영웅인 오디세우스를 헤브라이즘의 영웅으로 포착했다. 서구문명의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이라 할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 어떻게 교차할 수 있는지를 절묘하게 선보인 것이다. 고전이 고전이려면 여전히 동시대적 울림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생생히 입증한 사례라는 점에서 '걸작'으로 불러도 아깝지 않을 작품이다.
오디세우스의 노래라는 뜻의 ‘오디세이아’는 기원전 8세기의 작품이다(오디세이는 오디세이아의 영어식 표기). 헤브라이즘의 원천인 예수 탄생 800년 전의 작품이기에 헤브라이즘과 무관하다. 그럼에도 놀란은 ‘오디세이아’에서 헤브라이즘의 핵심사상인 죄의식을 길어올린다. 어떻게?
10년간 이어진 트로이전쟁이 끝나고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려던 오디세우스가 다시 10년 세월을 떠돌게 된 이유를 파고들어서다. '신들의 저주' 때문이라는 것이 호메로스의 설명이다. 구체적으로 영화에서 오디세우스 일행이 귀향길 첫 기착지에서 외눈박이 거인 퀴클롭스의 하나인 폴리페모스의 눈을 멀게 만들었고, 폴리페모스의 아버지인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노해 오디세우스 일행의 귀향을 막아섰다는 것이다.
이타카의 왕인 오디세우스를 따르던 병사들은 불만을 품는다. 오디세우스가 불필요한 짓을 벌여 바다의 신을 노하게 하는 바람에 자신들까지 귀향을 못하게 됐다고. 그리스비극에서 영웅적 주인공이 비극적 운명에 처하게 되는 원인으로서 성격적 결함인 '하마르티아(hamartia)'와 오만함을 뜻하는 '휘브리스(hubris)'로 풀어낼 수 있는 죄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건 신들의 저주의 일부에 볼과하다는 게 드러난다. 하마르티아와 휘브리스를 능가하는 보다 심층적 죄의 산물이다. 영화에서 ‘제우스의 법’으로 불리게 되는 '크세니아(xenia)'를 위반한 죄다. 나그네의 신이기도 한 제우스는 낯선 이방인을 환대하지 않으면 자신의 저주를 받게 될 것이라고 천명한 것이 바로 크세니아다.
크세니아는 비단 그리스인들만의 법이 아니라 고대인들의 공통 규범이기도 했다. 공자가 말한 ‘기소물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과 예수가 말한 황금률(Do unto others as you would have them do unto you)이 가리키는 바 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트로이의 목마’는 바로 이를 악용한 계략으로 풀어낼 수 있다. 오디세우스가 가담한 그리스연합군이 후퇴하면서 해변에 남긴 목마를 트로이인들이 성내로 들인 것은 그것을 선의의 선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대한 환영식까지 열지만 자신들도 섬기는 아테네여신에게 바치는 선물인 줄 알았던 목마 안에는 그 믿음을 배반하는 흉계가 감춰져 있었던 것.
끝나지 않는 전쟁으로 10년간 억지 타향살이를 해야했던 오디세우스가 귀향의 꿈을 이루기 위해 낸 이 계략은 크세니아의 기초가 되는 인간의 선의에 대한 믿음에 결정적 타격을 가한 불경죄라는 풀이가 가능해진다. 그에 대한 벌로써 오디세우스의 고향 이타카의 가족이 짊어지게 된다는 해석의 문도 열리게 된다. 20년간 가출 상태인 남편을 기다리던 오디세우스의 아내 페넬로페와 아들 텔레마코스는 페넬로페의 재혼상대가 되겠다며 몰려드는 청혼자들을 내쫒지 못하고 환대해야 하는 무간지옥에서 살아가야하는 벌.
그 무간지옥에서 탈출하는 방법은 가장인 오이디푸스의 귀환이다. 아니 최소한 그의 생사여부의 확인이다. 신들의 저주는 이를 막아섬으로써 오디세우스 자신은 물론 그 온가족에게 화가 미치게 만든 것이다. 처음엔 부당하다고 생각했던 오디세우스도 거듭된 시련 속에 그 저주의 본질을 꺠닫게 된다. 바로 자신이 저지른 '원죄(original sin)'에 대한 자각이다.
영화에선 이를 상징적 화면으로 보여준다. 불태워지는 트로이성, 아테네 여신 동상의 목이 잘려 굴러 떨어지는 것, 수난을 당하는 트로이 여성이 아테네 여신의 얼굴을 하고 있는 것. 하지만 호메로스는 그 악행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대부분의 성인남성을 향해 복수의 칼날을 휘두르고, 트로이의 모든 여성을 강간하고, 임시한 여인의 뱃속에 있는 아이들까지 무참하게 죽였다고.
트로이 전쟁이 발발하기 전부터 영화 속 그리스인들에겐 모종의 공포가 감돈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그 위기감은 점점 커진다. 이타카의 왕비인 페넬로페에게 재혼을 강권하는 이유도 그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묘사된다. 호메로스의 원작엔 언급되지 않는 '바다의 사람들(People of the Sea)'이 밀어닥쳐와 제우스의 범이 지배하는 최고의 그리스문명을 파괴할 것이란 두려움이다. 역사적으로 아가멤논과 오디세우스 같은 청동기영웅들이 활약하던 미케네 문명을 무너뜨리고 암흑기를 몰고온 이방세력에 대한 공포를 반영한 것이다.
영화 마지막 그 불길한 '바다의 사람들'의 정체가 드러난다. 바로 제우스의 범을 무너뜨리고 트로이의 문영을 송뚜리째 무너뜨린 오디세우스 그 자신과 그의 계약을 실천에 옮긴 그리스인들이다. 이방에서 오는 괴물이 아니라 바로 침략전쟁을 수행하고 돌아온 자신들이라는 명징한 작각이다. 영화는 그것을 자신의 원죄에 대한 오디세우스의 처절한 고해성사로 그려낸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로 돌아온 트로이전 참전용사들의 피폐한 모습은 참전용사들이 과묵해지는 이유가 어른이 되어서가 아니라 죄의식 때문임을 고백한 20세기 미국 소설가 커트 보니것의 작품 속 주인공들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가 아는 오디세우스 모험의 본질이 무엇인가. 낯선 공간에 떨어졌을 때 거인, 마녀, 괴물로 형상화된 타자가 가하는 괴롭힘과 공격, 핍박 아니었던가. 오디세우스의 모험 공간은 지중해와 대서양을 벗어나지 않으니 곧 우리가 아는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다. 이는 곧 이 영화를 보는 주요 관객인 서방선진국 사람들에게 거울을 들어 그들의 모습을 비추는 효과를 발생시킨다.
오늘날 그 기괴하고 추악한 타자의 몫을 누가 맡고 있는가? 생존을 위해서건 기회의 창출을 위해서건 낯선 땅으로 이주하려는 이들을 막아서고 괴롭히고 추방하는 거인, 마녀, 괴물은 과연 누구인가? 바로 미국인이고, 유럽인이고, 일본인이고, 한국인 아닌가?
그런 점에서 영화에서 미녀와 영웅의 얼굴을 갖고 유희를 펼친 장면들이 신의 한 수였다. 트로인 전쟁의 원흉으로 낙인찍힌 미녀 헬레네와 그 쌍둥이 언니이면서 희대의 악녀로 낙인찍힌 클리타임네스트라를 흑인여배우 루피타 뇽오가 함께 연기했다. 푸른 눈에 흰 피부를 지닌 금발미녀(the fair)로 묘사되는 그들을 왜 흑인으로 대체했을까? 천하절색이네 경국지색이네라는 묘사가 전쟁의 책임을 연약한 여인에게 전가시키기 위한 허상임을 폭로하기 위함 아니겠는가? 사랑의 완성을 꿈꿨다가 천하의 조롱거리가 된 여인과 그 사랑의 결실이었던 딸을 잃고 복수의 화신이 된 여인이 결국 남성중심 세계관에 희생된 동일운명체임을 보여주는 설정인 것이다.
또 트로이 전쟁을 기획하고 지위한 총사령관 아가멤논의 얼굴을 시커먼 투구 뒤에 감춘 이유가 뭐겠는가? 트로이 정벌을 통해 동서교역의 통로였던 트로이가 축적한 막대한 부와 해양교역권을 확보하기 위한 시커먼 욕망이 그 밑바닥에 똬리를 틀고 있음을 폭로하기 위함 아니겠는가? 서구문명에서 영웅이라 떠받들여지는 이들의 상당수는 그런 추악한 욕망의 화신이기에 아무런 개성이 없는 '얼굴없는 존재'로 그려낸 것이다. 최고의 문명이라 자부하는 서구문명을 지키낸 영웅 행세를 하는 그들이야말로 변방의 민족을 '바다의 사람들'이라고 타자화/악마화한 장본인들이란 극적 장치다.
'오디세이아' 속 오디세우스는 키르케의 마법을 빌려 하계로 내려간 죽은 영웅들을 만난다. 그중에는 전우였던 아킬레우스도 있고 헤라클레스와 같은 전설적 영웅도 있다. 하지만 영화에선 페넬로페와 대비되는 클리타임네스트라에게 살해된 아가멤논과 전사한 오디세우스의 부하들만 부각시킨다. 원한과 원망만 가득 찬 그들은 오디세우스와 달리 자신들이 저지른 죄에 대한 죄의식다. 충실한 전우, 남편과 아버지로서 고뇌하는 얼굴의 오디세우 대 아무런 감정도 표정도 없는 익면(匿面)의 존재로서 아가멤논의 대비효과가 여기서 발생한다.

뒤풀이해 말하지만 놀란의 '오디세이'가 걸작인 이유는 그 시각적 효과 때문이 아니다. 유럽문명의 중추에 자리잡은 2800년 전의 고전에 숨겨진 심층적 메시지를 21세기에 새롭게 건져올린 데 있다. 따라서 원작에 충실하지 않았다는 학자들의 불평은 영화 속 키르케가 돼지로 변신시킨 오디세우스 선원들의 불평과 다를 바 없다. 오디세우스가 왜 신들의 저주를 받게 됐는지보다 원작주의라는 고향이 주는 익숙함에서 벗어났다는 배부른 돼지의 불만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면서 원작인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가 무수한 이야기의 원천었음을 발견하게 되는 재미도 쏠쏠하다. 영하를 보면서 사랑하는 가족이 있는집으로의 귀소본능을 다룬 '로빈슨 크루소'와 '걸리버여행기', '이노크 아든', '마틴 기어의 귀향', '캐스트 어웨이' ‘, '마스'와 같은 작품들이 쉴 틈 없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귀향한 오디세우스가 홀로 호메로스에 따르면 108명이나 되는 불청객들을 응징하는 장면에선 쿠엔틴 타란티노의 '펄프 픽션'(1994)과 우베르토 파솔리니의 '리턴'(2024)이 오버랩되면서 야르한 재미도 안겨준다.
그 응징을 통해 귀향을 완수한 오디세우스가 페넬로페오 함께 다시 서쪽 바다를 항해 항해를 떠나는 모습을 보면서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란 어느 군가의 가사도 떠올리게 된다. 그래서일까? 175분의 영화가 끝나고 영화관을 나설 때 이런 말을 읆조리게 됐다. '고전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 진가가 끊임없이 재발견될 뿐."
-2026년 8월 7일(서울 일부지역에서 섭씨 40도가 넘을 정도로 절정의 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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